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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

지은이
버트란드 러셀
출판사
사회평론
페이지수
270
대상
이 책은 저자의 전공인 철학 수학 과학 논리학같은 골치아픈 종류가 아니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인류평화의 적으로 간주한다. 뿐만아니라 서구 기독교 문명이 지닌 불관용성과 그로 인한 잔인성을 질타한다. 또한 청소년들의 기존가치들 종교,국기,진보,아름다움,진리 등등을 왜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를 아버지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다 미디어 서평 서양 사람들은 부지런한 동물로 비버와 개미를 든다. 그러나 사실 비버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일하지 않는다. 개미도 군락 전체로 보면 늘 바삐 움직이고 있지만 일개미만 따로 놓고 보면 쉬는 시간이 더 많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근로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줄인다고 발표해 세인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일주일에 5일을 근무한다고 볼 때 직장에서만 하루 평균 7시간을 일하는 셈이다. 지금보다는 훨씬 한가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반세기 전에 이미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기술문명의 발달로 노동구조를 개선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색하면서 `무용한` 지식을 창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왜 문명의 이기는 속속 발명되어도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숨가빠지는 것일까. 얼마전 두 동료 교수가 박봉과 잡무로 인해 연구에 전념할 수 없다며 서울대를 떠났다. 걸핏 하면 `공부 안하는 대학교수`라는 질책을 받는 주제에 할 얘기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교수들은 너무나 빈둥거릴 시간이 없다. 빈둥거리며 사색할 시간은 커녕 숙제만 하기에도 하루해가 모자란다. 이건 노동이지 연구가 아니다.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빈둥거릴 수 있는 시간을 찾아주지 않는한 결코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우리가 남보다 일을 덜 해서 IMF사태를 맞은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전보다 더 정신없이 앞만 보며 뛰고 있는 우리들을 보라. 곧 또 넘어져 무릎을 깰 일이 불을 보듯 뻔하다. 천규석님의 말처럼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반성적 게으름을 부르짖던 러셀의 지혜가 다시금 아쉽다. <동아일보 99/10/02 최재천 교수(서울대 생물학)> 어느 가요 가사에서 재치 있게 표현한 것처럼 주위엔 온통 네모난 것 투성이다. 방도, 침대도, 창문도, 텔레비전도, 책도, 신문도, 컴퓨터도…. 그러다 보니 생각마저 점점 네모를 닮아간 듯,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사각 틀 속에서 얌전히 사고할 줄 아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닌 생각의 크기만큼 세상을 볼 것이라는 말은 정말 옳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생각이 담긴 그릇의 모양대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보자면 생각이 곧 운명이라는 말도 퍽 일리가 있다. 세상이 말하는 바 옳다는 것과 도덕적이라는 것에 대해 단 한마디 거역도 못 해본 채 소심하게 살아온 편인 나는 주제넘게도(?) 가끔 `삐딱한` 삶을 동경한다. 그러한 유의 용기 있는 자들을 남몰래 흠모하기도 여러 번이다. 그 버릇 탓일까? 삐딱한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끌었으니 바로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다.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녔던 저명한 철학자로서 러셀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린 처방은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파격적인 것이어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35년에 씌어진 옛 글을 통해 주장한 것이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러셀은 왜 게으름을 찬양하는가. 그는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선한 본성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하루 네 시간 정도 필요한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할 때 문명이 발전될 것이요 개인들은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기술의 발전이 노동시간 단축을 가능케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근로가 미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과잉생산과 파산, 실업의 고통을 초래해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으로, 게으름에 대해 느끼는 원초적인 가책부터 용감히 떨쳐버리라고 역설하고 있다. 러셀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였듯 `무정부주의자이며 좌파`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는 이 글은 신기하게도 60여 년 전 과거 얘기가 아닌 현재와 미래의 우리 일상을 꿰뚫어보게 함으로써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다. 건축과 연관된 사회문제를 지적한 글에선 바로 지금 이 시대 여성의 지위를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탁월한 식견을 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바깥을 향한, 조그맣고 네모난 창 하나를 겨우 소유하고 있던 내게 러셀의 글은 자못 충격적이다. 그가 사회 현안을 바라보는 시각은 툭 트인 바다로 향한 듯 무한대로, 무형태로 열려 있고 그 속을 헤엄치는 나는 자유로움에 저절로 온몸이 둥둥 뜨는 듯하다. 그의 말을 좇아, 나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오래 된 강박관념을 벗어 던진 결과일까? 어쩐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에 사로잡혀 본다. <한겨레신문 99/04/21 오미영(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