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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1) 이저의 독서행위 이론


이런 심미적 경험을 독서심리학과 연결하여 이론을 정립한 학자로는 볼프강 이저 (Wolfgang Iser)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그간 자신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독서행위를 집중적으로 언급해왔다. 그에 의하면 문학적 텍스트는 형식과 의미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빈자리 Leerstellen”를 포함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것을 “의미”로 채우고 심리투사의 공간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이런 빈자리는 곧 독자나 작가가(인간이) 지배적인 세계상, 의미체계, 사회체계, 고정된 세계해석, 조직된 구조를 파기하고 그 자리에 환상충동이나 상징으로 대체한다는 뜻이다. 프로이트와 융, 나아가 이저를 포함한 문예학자들은 기호와 상징의 차이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많은 기호학자들이 상징을 기호 속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노력(예를 들어 박이문, 기호의 해석 (기호와 해석, 문학과지성사, 1998, 12쪽))과는 달리 상징은 고유한 영역이 있다. 오히려 상징학자들에게는 기호가 상징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개념이 단순한 낱말과 동일하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나 자세한 설명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호이다. 그러나 그것에 감정적 톤이나, 상상력, 욕망, 문화적 의식, 종교적 제의 등이 부과되어 하나의 (많은) 연상(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상징이다. 그러므로 기호가 수렴한다면 상징은 확산한다고 볼 수 있다.

아래에 있는 스위스의 화가 에르하르트 야코비의 그림을 보자. 〈동물이 길을 건널 수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뜻의 표지판이 있는 고속도로에서 운전자들이 난데없이 코뿔소, 공룡, 코끼리를 보고 있다면 꿈의 이미저리가 수렴적 기호가 아니라 확산적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1=2 라는 수를 셈할 때도 뭔가를 보게 되며,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을 논구(論究)할 때도 반드시 상상을 통해 하게 되어 있다. 붉은 색을 상상할 때도 어떤 옷의 붉은 색이라든가, 아니면 장미꽃의 붉은 색 등 구체적인 감각자료에서 상상하지 추상적으로 상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수전 K. 랭거는 어떤 기호가 의미를 하되, 그 기호를 너머 스스로 직조한 규범적 의미를 창출해낸다면 그것이 곧 상징이다(Wenn sich ein Zeichen zeigt, dem zusätzlich eine selbstgesponnene normative Bedeutung assoziiert wird, ist es ein Symbol)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텍스트의 기호는 독자/환자의 심리적 상징을 환기하고 그것이 곧 빈자리 채우기라 말할 수 있다.


각 학자들마다 용어나 개념정의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독서가 문예학적으로 기호의 해석을 넘어 빈자리 채우기임은 분명한 인류학적 카테고리이다. 콘스탄츠 학파들은 그래서 영향미학과 수용미학을 문학의 인류학이라고 표현하였다. 환상충동으로 인한 빈자리 채우기가 곧 작가의 세계구상이요 독자의 독서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저는 이것을 개념화하여 “선택 Selektion”이라 명명하였다. 이런 선택은 노이로제 환자의 특수한 세상의 구조와 유사하며, 일반적인 독자가 책을 읽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실수행위, 꿈, 노이로제 이 세 가지가 무의식과 의식이 충돌하여 생성된 복합체라고 보는데, 그의 견해를 적용해 보자면 위에서 말한 작가의 ‘선택’이란 이런 무의식이 드러난 특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선택’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만약에 인간이 보편 타당한 하나의 세계현실에만 산다면 평생동안 강가에 있는 개구리 마냥 정해진 루트로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고유의 세계를 늘 새로 창출하며 그것을 상징적 세계로 연결하여 의미를 만들어, 그 “의미의 그물 망” 안에서 살고자 한다. 타자의 상징적 세계 또한 그 질료는 다르지만 유사한 형식 때문에 우선 환자/독자가 처한 고통에 어떤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독서심리학에서 이저가 주장하는 작가/시인의 ‘선택’과 독서치료의 자료로서 환자에게 제공되는 위안이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의 고유한 ‘선택’이 곧 독자/환자가 처한 고유한 상황과 비슷할 때 책은 읽혀지고 심리는 위안을 받는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 이저가 주창하는 것은 문학적 텍스트가 ‘조합’ Kombination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그는 『독서행위 Der Akt des Lesens』 2판 서문에서 엘리어트의 ⌈프러프록의 사랑노래 Prufrock⌋ 두 구절을 예로 든다.

Should I, after tea and cakes and ices,
Have the strength to force the moment to its crisis?
차를 들고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몇 번씩이나 먹은 후에
나는 이 순간을 위기로 몰아갈 힘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 시에서 시인이 ‘선택’한 것은 서구 언어의 규칙에 따라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사라진다) “ices”와 “crisis”를 각운(脚韻)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일견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런 선택은 곧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지평을 예고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독자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조합에서 의미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두 언어가 (동시에 세계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느냐는 것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근친상간이나 크고 작은 금제(禁制)들은 사실상 이 두 언어의 결합에서 보듯이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내적으로는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 시에서부터 살펴보자. “crisis”라는 비교적 고상한 언어는 “ices”라는 비교적 진부한 언어와 관련을 맺음으로써 진부해지고, 거꾸로 “ices”는 의미가 상승된다. 어쨌든 두 어휘의 불명확성만큼이나 의미의 진동은 커지고 독자는 상징적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독자는 화자가 어떤 노이로제적 비정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한다는 것은 이런 부조화를 조화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작가가 세계를 무작위로 조합함으로써 창조하는 의미인 것이다. “ices”와 “crisis”는 이질적이면서 조화되어 의미를 발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