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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생활문/수필

제목 우울증
글쓴이 김현진

  생각보다 오래된 건 아니다. 아니다, 오래된 건가? 사실 처음으로 시작된 건 오래전이다. 그러나 항상 같이 있었던 건 아니다. 순간순간 느끼는 즐거움이 쌓여 그 하루를 닫는 아름다운 문이 된 적도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 계절의 정취를 만끽하고,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소소한 행복함을 느꼈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사랑은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 나은 줄 알았다. 이젠 나도 밝아졌고, 그저 한 번씩만 당신이 떠오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판단의 오류였다.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정신이 나약한 사람들만 만난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독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당신이 지독하게 매달리고 붙어서 마음을 찢어버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혹은 당신의 존재를 가볍게 치부하는 사람도 많다. 과연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역시 사람마다 다르듯, 상대적인걸까.

당신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대의 존재가 뿌옇게 흐려져 당신의 모습이 안 보일 때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때마다 어김없이 눈 앞에 보였다. 언제까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난 그대가 이제 좀 나를 떠나 혼자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 상처주지 말고, 마음을 짓밟다 못해 찢어버리는 그 짓도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내가 사랑하거나, 그리고 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기억들이 산산조각 나서 깨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너무 무서워진다. 이러다가 점점 내 사람들과 멀어질까봐 소름 끼칠만큼 두렵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 싫어진다. 하지만 당신이 던져준 무기력이란 감정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버린 내가 한심할 때도 많다. 당신을 탓하진 않는다. 내가 받았고, 또한 의지의 문제도 있는거니까. 그대는 이런 나의 모습을 알고 있는걸까.


  그대는 도대체 왜 내 곁에 왔을까. 내가 그대를 간절히 원한 적이 있었었나. 어쩌면 그대의 존재는 당연한 게 아닐까. 내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감정들이 쌓이고 쌓였는데 그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인가. 좌절하고 넘어지고 힘들 때마다 당신에게 취해있었고, 그 다음날이 되어도 제정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기간이 계속 지속되자 결국 난 당신에게 빠져 정신을 잃은 건가. 그럼 난 누구를 탓해야 하는걸까. 내게 닥쳐온 일들을 쿨하게 넘기지 못한 내 성격? 아니면 그 감정들을 연소시키지 못한 내 불찰일까? 난 왜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걸까. 어쩌면 시초는 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 난 당신 때문에 오늘도 길을 잃는다. 바다에 빠져 점점 빛은 안 보이는데 수영은 못해서 누군가가 날 꺼내주길 기다리며 죽어가는 기분이다.


  난 그대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무척이나 싫다. 그 이유는 그대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목을 밟는 게 너무나도 싫다. 나 하나로는 만족하지 않는걸까. 당신 때문에 주어진 삶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당신을 만나면서 또 다르게 알게 된 그 존재는 당신과 함께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매일 밤 불안하고, 그러다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고, 내일 아침 눈 뜨는 게 두렵게 만들었다. 내가 그 존재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아직도 당신은 내 내면 속 깊숙이 스며들어있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어 남아있다. 당신을 묻을 수 있을까. 묻는다고 해도 당신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 깊은 곳에 있다가도, 결국 그대는 또 다시 존재를 드러내겠지.


  내가 처음부터 당신을 증오했던 건 아니다. 잠깐 찾아오는 당신에게 빠져있는 기분은 몽환적이고 황홀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과의 만남을 조금씩만 가질 땐 괜찮았다. 그럴 때마다 침착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생각을 더 이성적으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 자신을 조금 더 정확하고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지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말이 맞다는 걸 당신을 통해 오늘도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그대가 떠나는 게 두려울 때도 있다.


가 모든 일의 이유로 대던 당신이 사라지면, 당신을 핑게로 대오던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허무해져서.

그리고 앞으로 내가 당신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들키기가 싫어져서.

난 정말 모순적인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