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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감상문

제목 낯선 죽음을 읽고
글쓴이 조단비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 Lev Nikolayevich Tolstoy

 

생명, 자연, 우주를 총괄하는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는 지혜에 관한 논의

 

 

 

< 낯선 죽음 > 지안 도메니코 보라시오 지음 / 박종대 옳김 / 다봄

 

 

     

 

존엄은 생명에게 있어 모든 행위를 관통하는 중대한 관념이다.

 

세상은 자신을 존중하여야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죽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와 같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는 삶의 질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사는 동안 확실하게 찾아오는 죽음에 관하여 고민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개수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자가 붕괴하는 세포처럼 생물학적 진화에 따른 죽음과 보호 활동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살아가며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낯설다면 우리가 빛이 굴절된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야 망막에 맺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듯이 자신에게 가까운 덕분일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얼굴과 피부와 척추의 뼈를 가로지르는 등잔 밑을 넘어 사물과 오감에도 붙어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을 담고 있는 낯선 죽음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삶의 길동무로 삼고 싶은 책이자,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죽음에 있을 수 있는 모든 통과역을 단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이 책은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생이 시작할 수 있음을 알린다. 이 책은 의료기관 종사자나 환자, 환자가 있는 가정, 사회 보건 복지 기관, 정치와 법률계 종사자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읽고 생각하며 살아있는 동안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이 담겨있다. 한국에도 대한웰다잉협회, 한국호스피스완화의학회나 한국완화의학연구회 등이 있고 관심을 가진 전문가와 봉사자들이 모여 강의와 교육을 도맡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요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만약 낯선 죽음에 나온 유럽의 일부 대학과 같이 대학 내 교육 과정에 완화 치료가 포함되어 관련 기관에 임종실이 생기고 전문가와 성직자, 봉사자(호스피스)가 연계하여 사회 내에서 많은 이들에게 소개될 수 있다면,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음에 관하여 인지하고 관심을 가지며 연속적인 선상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면 죽음을 준비함으로 자신과 나아가 서로의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그중에서도 죽음에 관한 "고통"은 맞이하는 이와 바라보는 이, 스쳐 지나가는 이들에게 살금살금 다가와 언젠가 저도 모르게 발화되는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예감, 완화 치료가 일반화되는 미래가 오리라는 예상은 필연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누구나가 겪고 있지만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인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어떠한 과정이 맞물리는 교차로에서 찾아오는 임종에는 어느 때보다 만나고 떠나가며 남게 되는 서로를 위한 예우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두려워하지 말라

 

 

특정 환자나 가족에게 어떤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는 미리 판단할 수 없다.

p138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목숨만 유지하는 것이 정말 치료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단순한 생명 유지가 인위적으로 영양과 수분을 무한정 공급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이는 앞으로도 계속 토론해야 할 문제다.

p157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와 건강 대리인 위임장의 결합, 자신의 소망과 생각에 대해 대리인 · 가정의 · 담당 의사와 상담하기, 이 두 가지야말로 임종 단계에서 자신의 소망이 실제로 존중받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다.

p186

 

 

감상문을 적기에 앞서 나는 낯선 죽음에서 명시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를 보며 한국에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을 검색해보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을 앞두고 작성하는 연명의료계획서와 달리 건강할 때 의식이 없을 경우를 상정하여 치료에 관한 의사를 국가 전산망에 기록하여 밝혀두는 것을 지칭한다. 죽음을 앞두고 의사가 바뀔 가능성을 포괄하여 치료나 절차에 관한 사전 이해를 필요로 하므로 관련 교육을 이수한 상담사와 대면하여 작성한다. 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노력과 연명치료를 둘러쌓은 논쟁, 이익관계와의 마찰은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환자의 생전 가치관에 따라 장기 기증을 위한 희망자를 등록하듯이, 치료를 통한 회생 가능성이 없고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의 환자를 마주한 의사가 절박한 상황에서의 구호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의향서를 쓰기 전에 상담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환자의 상태는 무엇이고, 어떠한 때 어떻게 치료를 진행할 것인가?

2. 호스피스, 자원봉사, 장례 등 관련 기관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안내를 받을 것인가?

3. 환자 자신이 원하는 치료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4. 죽기 전 고민이 되는 일과 불안을 느끼는 일은 무엇인가?

5. 함께 소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사후 원하거나 필요한 조치(기증을 포함하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리고 위급 시 가족이 대신 사망과 관련된 의향서를 작성하는 경우, 평소 환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원하리라 예상할 수 있는가?

 

 

2019531일을 기준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등록기관은 총 110개가 있는데 그중 공공기관 분야 2개는 197개의 건강보험공단본부와 지사 및 출장소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체로 보건소나 해당 의료기관에서 작성할 수 있고 비영리법인에는 호스피스와 종교기관, 연구원 등이 있다. 19세 이상의 성인이 신분증(주민등록증 또는 운전면허증)을 지참하고 방문하면 된다. 시사에는 완화치료에 관련된 법 조항을 "연명의료 결정법"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으로, 20161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호스피스는 201784, 연명의료는 201824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니 꾸준히 진행되던 연구와는 달리 완화치료에 대한 한국의 공식적인 도입은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201912월을 기준으로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보면 전국의 인구수는 51,849,861명인데 피라미드 형식이 아닌 타원형의 분포도에 따라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나와있는 사전연명치료의향서를 작성한 국민이 532,667, 연명의료계획서 등록자는 35,433명인 것을 보면 195월에 추산된 22만 명이던 때에 비하여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만 "생명에 대한 치료가 먼저인가 환자가 먼저인가"하는 화두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연명을 통한 고통과 죽음, 죽음을 앞둔 치료의 정도"에 관한 자신만의 의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절차적 무지(법과 인식)로 인해 타인이 존엄을 결정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고 느낄수록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울 뜻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의 상황부터 알아야 한다. 그게 배려의 핵심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83

 

 

생명과 윤리에 관한 물음과 더불어 소극, 적극적 안락사와 죽음 보조, 식물인간에게 하는 생명 연장, 불안에 관한 조치를 취할 때의 지침, 위급 시 의학과 종교 가정과 봉사자들이 할 수 있는 대안에 관련한 실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낯선 죽음은 죽음 앞에 비이성적인 행동과 주변과 자신을 통제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가 매한가지일 수 있다는 가설을 상기하게 하였는데, 나는 그것이 평소에도 자주 발견되고 있는 태도에 속하는 일은 아닐까 했다. 개인이 상황을 대하는 '태도''감정'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지식이나 운동과는 상관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지를 알아야 가치를 느끼고, 튼튼해야 자신과 외부를 버텨낼 수 있듯이 지식과 운동은 맞이하는 일들을 건강하게 느낄 수 있는 윤활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식과 운동'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개인이 가진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기 어렵다는 가정과 일맥상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둘이 같은 환경과 대우를 받으며 한 선생님 밑에서 배운다는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반응하는 태도가 서로 다를 수 있듯이, 상황을 대할 때 같은 것과 다른 것에 관한 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음은 개인의 자질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 탁월한 태도를 소유할 수 있는가'를 원하는 이들은 많고 자질은 키울 수 있지만 본인에게 없었던 것들이 생기지는 않는다. 사유의 시선은 본인의 것인 덕분이다. 학습이 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길을 닦아줄 수는 있어도 학습을 통한 반응을 개인의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 기인되어 있을 거였다. 정서적으로 느낀다는 것은 창의력의 존재 여부와도 같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있어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이는가는 곧 자신의 실존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존재의 상징으로 여기며 인정받기 위하여 노력하고, 타인이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의도적으로 현실에 같거나 다른 맥락을 부여하며 자신을 드러냄을 통해 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이러한 자신 중심의 자아실현으로부터 타인을 향한 이타성이 두드러지는 순간을 노화 또는 죽음을 앞둔 이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노화가 진행될수록, 병세와 환경에 따라 느낄 수 있는 부분에 차이가 있고, 노화와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이들 중에서도 힘 없이 악화된 육체를 가진 이들이 타인에게 이타적일 확률이 높았던 걸 보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갈 것인가 아닌가"하는 질문이 태도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어떻게 해야 타인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평가를 받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평가를 관철할 수 있을지 보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지금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타인과 내가 왜 그러하였는가" 하는 그대로를 느끼는 일을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질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질문을 하는 일이고 일화 내지는 타인을 통해 "나를 다양하게, 어떻게 볼 것"을 역설하려는 게 아닌 "외부를 다양하게 보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배려는 남이 나를 배려할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남을 배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인데, 다수의 사람들은 젊을 때에는 자신에게 남은 생이 많으리라는 생각에 이익과 무언가를 주고받을 위치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여 그렇지 못하는 일이 생기다가 육체가 노쇠하고 노쇠로 인해 시들어가는 전전두엽피질로 인하여 오히려 자주 분노하게 되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소유에 관한 집착을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가치가 실로 어떠하든(옳고 그름, 좋고 싫음, 이로움을 떠나)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 길을 닦아놓고 이 길을 걸어올 다른 이들에게 차례를 맡기며, 자신을 구성하려 하거나 더 많은 이익을 얻을 필요성이 줄어들고, 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에 관한 계획을 세울 시간이 남지 않은 덕분에 자포자기하듯이 당면한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현재를 받아들이며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체념(諦念)을 통해야 달관(達觀)이 가능하므로, 체념이 덕목이 되는 이유라고 할까. 완화의학에서 수용하고자 하는 안락사가 자살에 관한 조력이라기 보다 고통이 줄어든 채 맞이하는 자연적인 죽음이나 개인의 존엄성에 기인한 선택을 의미하는 일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는 듯싶다. 여기에서 말하는 완화란 육체의 통증을 넘어 정신과 결합된 존재와 관련한 고통의 경감이고, 살아있는 죽음으로의 자기 파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발로이다. 누군가가 태어날 때 그러하였듯이 죽을 때에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남겨지거나 떠나갈 수 있는 이들끼리 서로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선 내에서 죽음이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소통이 필수라는 낯선 죽음에서의 목소리는 소통이 모든 것의 기반이며 관계와 불가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에게 그러하듯이 난감한 질문(한 마디로 현실)을 받아들이기 용이한 상태에 있으려면 소통에 개방적이어야 하는데, 개방이라는 건 변화와 같아 자신 혹은 서로를 이유로 자신이 외면하고자 하는, 때로는 취약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공개하지 않으며 직면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여린 부분을 맞이하지 않고 무작정 행하려 들기만 한다면 무언가를 원하여 하는 행동이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 삶에 있어 죽음은 생사와 관련된 갈등이 존재함으로 살아있는 매 순간마다 서로를 사랑하며 소중하게 가꿀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선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나의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며 그들이 내가 그러하였듯이 언제까지고 사랑과 기쁨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하고 있었음을 떠올리게 해준 낯선 죽음은 자신과 타인, 어떠한 내외적인 갈등 속에 서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려하고 배려 받으며 완화되지 못한 고통을 흔들리면서도 안고자 했던, 안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상기시킨다. 강의가 책으로 나오기까지의 성원과 같이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하여. 나는 사회에 간절하게 움튼 완화 치료가 모든 의술에 녹아들어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존재의 갈등이 해소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서로의 시간을 세심히 보살피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죽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나타내는 증표와 같다. 살아야겠다.

 

 

*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라 글나라에도 감상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정말 좋았던 책들에 관하여 종종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