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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나라의 궁궐 - 경복궁과 창덕궁 답사기
글쓴이 이예은
경복궁과 창덕궁 답사기 수학여행 첫째날 우리나라의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 다녀왔다. 지난번 경복궁에 다녀왔을 때에는 경복궁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눈으로만 보고 왔었는데, 그때는 경복궁 곳곳을 둘러보아도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몰라서 참 많이 답답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ꡐ경복궁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가자ꡑ하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인터넷에서 경복궁에 대하여 알아보고 경복궁에 갔다.ꡐ아는만큼 보인다ꡑ더니 이번에 경복궁에 갔을 때는 눈으로만 구경하는 것이 아닌 우리 나라의 궁인 경복궁을 둘러보며 제대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처음으로 경복궁에 내려서 경복궁 안의 첫 번째 문인 흥례문 앞에 이르렀다. 흥례문 앞에서는 왕실 근위대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빨강 옷을 입은 사람들이 교대식을 하고 있었는데 복장이 참 멋있었다. 흥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지나왔다. 산을 배경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처마의 근정문이 보였다. 처음엔 몰랐었는데, 이곳에서는 왕과 문무 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한 곳이라고 한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에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 2품 이상이서고 남쪽으로는 정 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이르렀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올라간 처마 와함께 웅장한 근정전의 자태는 정말 멋졌다. 근정전은 왕이 신하들의 조하(조례의식)을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 했던 곳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경복궁 안에서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에는 주요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주위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근정전 앞마당에는 품계석이 있었는데, 신하들이 각 품계에 따라 품계석 앞에 섰다. 앞으로 갈수록 품계가 높은 사람이 임금과 가까이 있는 곳에 선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맨 앞으로 가서 정1품 품계석 뒤에 한번 서보았다. 그곳에서서 높이 근정전을 올려다 보았다. 월대위 근정전 앞에 임금님이 서 계셨다면 그 임금님의 모습은 참 높게만 보였을 것 같았다. 월대는 국가의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근위병이 서 있고 무악(舞樂)도 연주하던 곳이다. 상하 두단(상월대와 하월대)으로 된 월대에는 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계단을 두었다. 월대의 정면 중앙 계단은 삼도와 연결되어 있다. 중앙계단의 가운데 부분에 커다란 사각형의 넓은 돌이 있는데 가마를 탄 임금이 지나는 길이라고 한다. 이 사각형의 넓은 돌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구름속을 노니는 모습을 조각되어져 있는데 이것은 제후에 해당하던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ꡐ답도ꡑ라고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멋진조각이 조각되어있는 돌의 이름을 몰라서 참 궁금했었는데, 구경을하다가 경복궁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분을 만나서 여쭈어보았다. 그래서 이것이 답도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답도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답도의 좌우에는 문무관료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다. 그리고 계단 양쪽의 기둥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해치와 유능한 인재를 상징하는 기린 등의 여러 동물을 조각되어 있는데 참 멋있었고 이 계단이 참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근정전 건물안을 들여다 보았다. 왕이 앉는 용상과 아름다운 천장의 철조룡이 참 멋있었다. 근정전을 지나 경복궁의 편전으로 왕이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경전을 강론하는 곳인 사정전에 갔다. 사정전의 이름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는다는 뜻에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한다. 사정전은 임금이 평소에 집무하던 집무실이다. 설명해 주시는 분께서 이곳은 <일명편전>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고 하셨다.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같은 곳 이다. *사정전 - 思(생각할사)政(정사정)殿(대궐전)이며 국정을 생각하며 논하는 집 이라는 뜻이다 사정전건물의 바로 옆에는 세자와 세자빈의 집인 동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세자의 교육이 이루어 졌으며, 동궁은 세자궁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자선당과 비현각이 주요 전각이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당시에는 없었으며, 세종때에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자선당은 1999년 복원 된것이다. 동궁을 나와 강녕전과 교태전에 들어갔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다. 이곳은 내가 생각하기에 경복궁 안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한 곳인 것 같다. 교태전 지붕의 아름다운 형형 색색의 단청과 교태전 천장의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의 무늬.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과 교태전의 담장들은 황토빛의 수수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무늬로 아름다움과 세련미를 더했다. 강녕전이 웅장한 남성미가 넘치는 곳이라면 중전마마의 침전인 교태전은 여기저기 곳곳이 세심한 아름다움으로 여성미를 더한 곳이다. 자경전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단청과 곡선의 미가 살아있는 지붕은 우리나라전통 한옥만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담벼락의 무늬들도 정말 아름다웠다. 궁궐내의 다른 건물들은 용마루를 높인데에 비해 강녕전과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그 이유는 왕(용)이 있는 곳에 또 다른 용이 들 수 없다고 해서 이다. 크고 웅장안 강녕전 건물 안은 마방진처럼 같은 크기로 나누어진 여러개의 방이 있는데 왕은 평상시에는 가운데에 있는 방에서 잤고 나머지방은 비어있었다. 만약, 누군가 역심을 품고 침전으로 들이닥쳤다 해도 방안의 구조를 잘 알 수 없을뿐더러 왕이 어느 방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옛날 만원권 뒤에 있었던 경회루.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에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했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 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복궁을 관람한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창덕궁을 보러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가 막 창덕궁에 도착했을 당시 가장 더운 시간인 오후 2-3시가 되어 있던 터라 무척 더워 모두들 지쳐 있었다. 설명해주시는 선생님께서도 창덕궁에 대한 설명을 두세 가지 밖에 못해주셨다. 아쉽게도 창덕궁은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고 결국 가장 주요한 몇 곳만 둘러보고 왔다. 창덕궁은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 속에 자리를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창덕궁 안에 들어가서 창덕궁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을 따라 인정전에 갔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인정전은 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어졌는데, 현재 창덕궁에 있는 건물은 순조 때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라고 한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인정전 내부 천장 가운데는 멋있는 봉황 두 마리가 있다고 하셨는데 인정전 내부의 봉황을 보지는 못했다. 참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그 봉황을 찾아봤는데 참 멋있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그다음으로는 선생님을 따라 창덕궁 선정전에 갔다.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로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선정'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 7년(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 25년(1647)에 재건되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고 한다. 선정전에도 역시 인정전과 같이 천장에 봉황이 있는데 인정전의 봉황보다 선정전의 봉황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아름다운 황금 빛을 띄고 있다. 그다음으로는 중궁전인 대조전을 둘러보았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중궁전인 왕비의 침전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외부는 복도식으로 되어있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복도를 통해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다. 대조전 내부는 살펴보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더니 중국식 의자와 서양식 물건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임금의 침전인 희정당 희정당은 처음에는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임금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지어 졌다. 지붕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창덕궁 후원의 사진에서의 연못을 부용지라고 하고 정자를 부용정이라고 한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섬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이번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다녀와서 우리나라 궁궐에 대한 것을 더욱 많이 알고 싶어졌고, 관심도 많이 깊어진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내가 우리나라의 궁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점을 꼽으라면 4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우리나라 궁궐의 지붕에 관한 것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돌아다니면서 숱하게 많은 궁궐안의 모든 건물들에는 지붕이 있는데 그 건물의 특징과 쓰임새 등에 따라서 지붕과 지붕을 꾸미는 것들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내가 경복궁과 창덕궁에 가서 한옥 지붕의 종류중 팔작 지붕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외에 다른 건물들의 지붕의 종류와 지붕에 있는 용마루, 지붕을 이루는 구성요소 들에 대해서 더 깊게 알고 싶다. 두 번째로는 우리나라 궁궐의 배치와 구조에 관한것이다. 서양의 궁궐이나 건축물들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그들의 사고 방식처럼 자연을 배재한 건축물이 많다.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은 서양의 건축물 배치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궁궐, 특히 창덕궁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어우러져서 자연 친화적인 멋을 살려낸다. 자연과 어우러지게 지은 우리나라의 궁궐. 궁궐의 각 건물들을 배치하고 지을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지었는지, 궁궐의 배치와 구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세 번째로는 우리나라 궁궐의 조경에 대해서이다. 유럽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기하학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정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원을 둘러보면서 궁궐의 조경 하나하나가 정말 자연과 어울려 산 우리 조상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궁궐의 조경을 보면서 우리나라 궁궐의 조경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네 번째로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의 궁궐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졌다. 내가 경복궁에 갔을 때, 경복궁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선생께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략도 잦았고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궁궐이 원래보다 많이 회손되고 조상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우리나라 건축물들이 지금까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고 하셨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일제 시대때 많이 회손되었다고 하셨다.근정전 앞의 행각을 다 뜯어내고 넓혀서 박람회를 열고, 우리의 궁궐 곳곳을 일본식으로, 서양식으로 바꾸고... 많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일제 강점기로인해서 우리나라 궁궐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원래의 임금님이 사시던 완전한 모습의, 회손되지 않은 당당한 조선의 궁궐은 어떠했었는지, 어떤 궁궐의 건축물들이 회손되고 사라져버렸는지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리고 이번 경복궁과 창덕궁 답사를 다녀오면서 많은점을 알고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잘 알지 못했던 궁궐 건물의 각 명칭이나 궁궐의 구조, 궁궐안 각 건물들의 쓰임새,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조경에 대해서 알수 있어서 기뻤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넓은 궁궐 안을 돌아다니며 팔다리가 많이 아프기도 했지만 각 궁궐 안내인을 따라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삶과 손길이 담긴 궁궐 안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궁궐에 대해 배운 것은 참 값진 공부가 되었다. 그동안 잘 몰랐던 우리의 궁궐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이번 답사를 통해 우리나라 궁궐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건축물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번 경복궁과 창덕궁 답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 궁궐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궁궐을 내가 사랑하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궁궐에는 정말 아름다운 멋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화려하게 장식된 궁궐들을 보면 ꡐ화려하다, 웅장하다, 아름답다ꡑ라는 생각이 들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마음속에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화려함도, 웅장함도, 아름다움도 금방 잊혀졌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궁궐을 보고난 후의 내 느낌과 감동은 금방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 궁궐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한 멋이 담겨 있다. 그 소박한 멋이 나는 정말 좋다. 궁궐을 둘러보면 우리나라 산의 곡선을 본뜬 아름다운 곡선의 멋을 가진 기와지붕, 아름다운 전통 문늬의 문창살, 형형색색의 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지붕 아래의 단청, 경복궁 자경전 황토빛 소박한 돌담에 새겨있는 아름다운 무늬. 자연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창덕궁의 물위에 아름답게 있는 부용정. 수면위에 잔잔히 비치는 경회루. 우리나라 궁은 하나하나를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 건축물인 것 같다. 옛날 우리나라 궁궐에서 살던 사람들은 참 좋았을 것이다. 매일의 삶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궁궐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연 속에 그대로 아름답게 파묻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난 그렇게 자연속에 파묻혀 있는 우리 궁궐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