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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03 하계가족 문화기행-"우정을 태우며 "
글쓴이 常天
'03하계 가족 문화기행
"우정을 태우며 "
2003. 8.4
글쓴이 常天 허응만
1. 여행의 의미
무더운 여름을 피해보려는 마음에서 새로운 테마 여행을 갖고자 함이며, 이를 통한 가족 간 믿음과 사랑을 돈독히 한다. 즉 우정 만남을 통한 가족여행 테마로 정함이다.

2. 출발의 의미
지루한 장마의 끝자락 무더위는 갇혔던 몸과 마음을 열기나 하려는 듯 많은 인파들로 전국이 들썩이고, 또한 익사 사고가 빈발한다는 소식과 아파트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다이빙사고가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과거 김대중 정부의 경기활성화 차원에서 내려진 카드 사용한도 철폐로 인한 후유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카드 빚에 쪼들린 서민들의 애환은 어두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경기의 하락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취업전쟁으로 얼룩진 일상이다. 가족여행을 울산을 거쳐 동해안과 내륙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3.여행의 시작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부시시 비빈다. 오늘은 가족과 잠시나마 짬을 내어 피서를 떠날 참이다. 아이들은 이른 나머지 잠결에 눈매가 무거운 듯 하다. 장마비가 이따금씩 내리는지라 무더위는 가라앉고 오히려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고교시절 '한솥밥'에 정을 두고 자취를 같이 하던 벗(정윤영님)이 보고픈 우정을 태우려 "울산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곤 설렘에 오늘을 기다려 왔던 참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학창시절의 '나홀로' 단신에서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 맞이하는 감정은 세월의 흐름을 알 듯 하다. 불타는 우정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은 정으로 맺어진 인연이라서 보다. 가족들에게 만남을 흔쾌히 받아들임을 고마울 뿐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워할 뿐 만남은 2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음을 가족에게 말하였다. 피서객들로 도로마다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뉴스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차에 싣고 장호원을 지나 충청북도 '앙성'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곳 장호원 부근은 '복숭아' 재배 단지로 특산품을 이루는 곳이다. 길가마다  원두막을 마련하여 복숭아를 진열판매하고 있었다. 주름진 노파부터 시골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골 내음' 머금은 채 지나는 이 마다 자신의 걸작품(명품?)을 호소하고 있었다. 가족일행은 옥수수와 복숭아를 동시에 판매하는 곳에 초점을 맞춘 듯 판매대현수막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보물이라도 찾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한참이나 갈 무렵 충북 충주시 앙성면자락을 지날 무렵 찾고자하는 판매현수막을 발견하곤 잽싸게 차량을 멈추곤 흥정(?)을 하였다. 마당 언저리에 느티나무를 3-4그루를 심어 뜰 마루를 놓았다. 그곳에 팔순 된 듯한 노파가 더위를 쫒고 있었다. 판매하는 아주머니는 밝은 표정을 지은 채 복숭아와 옥수수를 손질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곁엔 남편 분이 머물며 복숭아과수원을 오가고 있었다. 시골에 연로한 어르신들만이 머물 뿐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나가 있을 진 대, 젊은 부부는 기력이 쇠하신 어머님을 모시며 머물고 있음에 묘한 감정이 인다. 세태의 험악한 자기 중심적 사고로 인하여 어르신과 함께 거하길 주저하건만 고향에 머물며 나름대로의 '보람된 일과'를 행하는 모습은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요즘은 농산물 거래의 세계화로 인한 수입품범람으로 농산물 수지타산이 맞질 않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백도(복숭아품종일종)와 옥수수를 사들고 차를 제천 쪽으로 내몰았다. 산척을 지나자 '천둥산'이 눈앞을 가르고 있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여기저기 둔덕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가 확장 준공되면 제천 영월까지 빠른 시간 안에 도달되겠지. 녹음이 우거진 천둥산 구비구비 길을 맞이하다 '박달재' 길로 접어들었다. 산림청에서 삼림욕장을 두어 숲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커다란 입구문을 바라보며 옛 성인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구비구비 산마루를 휘감으며 걷노라면 자연의 고귀함을 느끼게 하였다. 차를 잠시 세우고 산길을 걸어보노라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박달재 정상에 오르니 휴게소를 두어 숨결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平穩)이 엄습해 오질 않는가. 박달재 사연과 동상을 만들어 고개의미를 부연하고 있었다. 사연인 즉" 박달이라는 선비가 한양 과거보러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주막민박집에 하룻밤을 머물 즈음에 '금봉'이란 주막집 딸년과 눈정이 들어 며칠을 머물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을 태웠으리. 정은 마음으로 가슴으로 새겨둔 채 걸쭉한 미남의 과객에게 빠져들었다. 과거를 보고 나서 이곳에 정을 두고 백년해로 다짐한 사내(박달)는 봇짐을 걸러 메고 한양 길로 발을 재촉하였다. 처녀아낙(금봉)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과거급제해서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빌었다. 몇 일, 몇 달, 일 년, 몇 년이 지나도록 온다던 사내는 함흥차사(咸興差使) 무소식이라. 밤이면 밤마다 '무사귀환(無事歸還)' 빌었건만 허망 뿐 이었다. 님은 날(금봉)버리고 떠나심을 아쉬워하며 절벽에 투신자살하였다. 몇 칠이 지날 무렵 사내는 님(금동)을 찾아 돌아왔거늘 이미 때는 늦었다. 박달은 자신의 뒤늦은 행보에 한탄을 하며 여인(금봉)을 목놓아 부르다 뒤따라 꿈속의 금봉을 그리다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는 기막힌 사연이 서려있음을 대리석에 새겨놓았다. 지나는 이마다 애절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휴게소앞뜰에 이를 무렵 목각인형으로 다양한 옛 조상들의 애환을 만들어 조성해 놓았다. '자녀목(子女木)이나 애정상(愛情象)' 등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일상에서 생활하던 조상들의 모습을 해학적 이미지로 표현한 물상(物像)은 예술품이었다. 이러한 물상들을 바라보노라니 잠시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을 느끼는 듯 하였다. 어머님이 아이를 등에 엎고 한 손엔 바구니 머리엔 물동이를 인 모습에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어머님을 부르는 노래]
주름진 이마에 해맑음이 있어라.
손마디에 사랑이 흐르고
말 한마디 따스함이 있도다.
당신을 부를 땐 마음으로 다가와
내 곁에 머문다오.
참 사랑으로 거듭남이런가
가슴에 흐르는 젖으로
베품을 넌지시 건네주고
행복한 얼굴로 맞이한 어머님!
에로스사랑에 적시는 눈물이여
찰떡한입 여밀어 입가에 이는 미소
그득한 자비의 손길이어라.

어머님!!
어머님이시어!
넉넉한 당신은 품안을 감싸들고
찾아드는 온기는 평안이 있어라.
당신은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언제나 내 곁에 머뭄이 있네요.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당신을 그리워하며
영혼을 불태웁니다.
어머님을 향하여!

부모님들의 자녀가족에 대한 열정 어린 품안을 보는 듯하니 마음 구석에 찡하는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어려움을 어렵다 내색한 번 없으시던 부모님들이었기에 우리들에게 평안의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을 게다. 박달재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많은 상념(想念)에 잠기고 있었다. 어느덧 일행은 중앙고속도로  제천I/C를 들어서고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는 내륙지방을 관통하며 「지역적 폐쇄성」을 극복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복 6차선 도로를 춘천-대구를 연결하느라 수많은 터널이며 다리로 건설되었는데 지금까지 공사 중 '난공사'이었다. 시원스레 달리는 고속도로는 '준령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준령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경계를 이루는 지형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험준할 뿐 아니라, 괴암괴석이 어우러져 충청북도 지역의 단양에선 충주호반을 끼고 석회암지형으로 온갖 자연동굴과 풍부한 계곡 물과 어우러져 조선조 유학자 「송시열 선생」이 화양동계곡에 머물며 많은 유학적 철학사상을 닦곤 하였다.  경상북도 쪽으론 영주지방에 지형적 영향으로 낮과 밤의 온도차 심하고 풍부한 일조량으로 인하여 양질(良質)의 사과재배 단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도 5호선 주변에 흐르는 개울은 풍부한 모래와 물이 어우러져 고향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축건물이 있어 신라고승이던 의상대사 가 창건한 '부석사(浮石寺)'가 있는 곳이다. 임란 때 승려를 결성하여 왜적과 대적해서 구국(救國)에 큰공을 세웠던 「사명당과 유정대사」가  불도를 닦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께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님 손을 잡고 예불을 올리기도 하던 명 사찰이 있는 '영주'이다. 영주를 지나며 예천을 거처 안동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어 안동I/C를 나와 국도로 달렸다.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조 임란 때 재상을 지낸 「류성룡 선생」 선친이 조성하여 후손들이 지금껏 기거하며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낙동강 변에 위치한 「하회마을」이 있는 곳이다. 토·일요일면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안동 하회탈을 공연하고 있는 곳이다. 조선조 때 사회계급이 엄격히 존재하던 시절에 양반사회지도 계층들의 비판과 하층 상민 계층들의 애환을 해학과 풍자로 「사회적 불합리」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놀이문화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왕하여 머물며 한국문화의 우수성에 찬사를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을 싸고도는 낙동강 물줄기 형태가 「태극문양」을 이루고, 주변에 잔잔한 산과 들녘이 조화를 이루어 포근함을  느끼게 하며 마을 구석구석 햇볕이 잘 들어 천하 명당임을 칭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동 음식으론 『닭찜』『간고등어(자반)』『안동소주』가 유명하다. 34번 국도가 '서산-당진'에서 지나는 곳이다. 주변엔 『청량산』이 있고 선비들의 후진양성 서원들이 즐비하다. 서원은 일종에 사립학교이다. 학문적으로 입신한 분들이 자신의 학문을 전파하고 후진양성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조 땐 사회기강이 해이하여 잘못된 정책을 행할 때면 거침없이 왕에게 『상소(上訴)』를 하여 시정할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학자로서의 인재배출은 물론 정치가로서의 입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태(行態)가 왕의 존립마저 위태롭게되자 구한말 「대원군」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던 '서원'들을 '국기문란의 주범'으로 단정하고 『서원철폐』를 명하여 수많은 학자들을 형에 처하였다. 이는 정당한 의견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았고, 국가혼란으로 외침(外侵)에 의한 패망을 초래하였다.  선비의 고향을 뒤로하고 '영천'을 향해 달렸다.  영천은 「육군 제3사관학교」가 있는 곳이다. 대구로 이어지는 삼각 축을 이룸에 도로개설공사가 내륙의 교통요지를 이루려는 듯,「안동-경주간 국도 확장공사」와 「대구-포항간 고속도로」현장과 연계돼 분주히 변모하고 있었다. 해는 저물어 어둠이 주변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시 경부고속도로 영천I/C로 진입하여 울산으로 내달렸다.  피로가 눈가를 짓누룸에 '언양 휴게소'로 핸들을 돌렸다. 많은 피서 인파들이 휴게소를 점령한 채 북적거렸다. 울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기다리다 지친 듯 하다. 사실 손님보단 기다리는 당사자가 더 초조하고 긴장되는 것이다. 만남의 설렘으로 기다리는 심정은 정으로 살아가는 '한국적 정서'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게다. 잠시 머물다 언양·울산 I/C를 나와 울산시내 진입로를 치달았다. 허허벌판 '울산'에 '박정희 정권'시절 구국일념 하에서 공업입국의 진군을 울리며 「故 정주영」현대 창립자를 내세워 중공업의 시대를 연 곳이다. 조용한 바닷가와 뻘을 간척을 하여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현대 중공업과 현대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공업입국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는 곳이다. 바로 황무지였던 이곳에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창립자 정주영」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창립자 정주영」은 1946년경 북한 '통천' 지방의 한 조그만 산골마을에서 생활해오다 18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 판돈 70원을 훔쳐 무작정 홀로 단신 월남(서울로 상경)하여 쌀 점원에서 시작하여 푼돈을 모아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다 정비회사(카센터규모)를 설립하여 도전과 창조의 정신으로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울산은 도시의 형태가 '태화강'을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고 「방어진」을 공업 및 거주지역으로 개발하였다. 밤 11시가 되어서 친구 집에 도착하였다.  간만에 만나는 친구가족의 환대에 너무도 고마울 뿐이다.

[우정이여 영원하라]
맥주 한잔에 당신 얼굴 묻어두고
정을 남긴 흔적일랑  옷깃에 남긴다.
병을 들어 환호하고 넘치는 정 있어
오늘을 사는 구나.
흥건히 흐르는 정을 두고 내 벗을 부른다오.
창창한 앞날에 햇살이여 돋아나
밝음이 주변에 머물지니.

조용히 내밀어  바친 정을
사뿐히 내려앉아  마음으로 머물거라.
담담한 거품에 내 함성이 흐르니
자네의 온기를 느끼도다.

건아(健雅)한 한잔 술에 파고드는 우정이라
절절한 마음을 불살라서
영원이란 이름으로 우정을 태운다.
우정이여 영원하라 !
  
하룻밤을 친구와 손을 잡고 우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가족들과 함께 '현대중공업'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현대 중공업'은 민족의 산실로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회사다. 일본은 일찍이 조선공업이 번창하였지만, 80년대 접어들면서 '사양산업'이란 이유로 설비투자를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을 앞질러야 된다는 일념으로 기술과 설비투자를 확대개발 하면서 건조능력 면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을 능가하는 놀라운 기술 집중력을 보였다. 당황한 일본은 뒤늦게 허둥대었지만 사양산업이란 딜래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퇴양난 (進退兩難)의 상황에 처한 지금, 한국은 시설과 기술 투자 면에서 생산성이 두드러진 결과로 나타났다. 유럽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동감을 표하던 터라 조선공업의 입지는 좁아만 갔던 것이다. 가격 면이나 기술면에서 자체개발능력 우수성이 돋보이는 한국을 증오(憎惡)의 대상으로 여기고 집요하게 불공정행위를 트집잡아 무역분쟁을 야기 시키려 하고 있다. 선박의 노후로 인하여 교체시기에 접한 요즈음 세계 각국의 선주들이 한국에 집중발주하면서 '초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노사화합이 잘 이루어져 "'7년 무분규 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한다.  우리는 선박 건조현장을 둘러보며 규모에 놀라고 기술력에 놀랐다. 이러한 거대한 회사를 창조한 '아산 정주영님'의 도전-창조정신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요즈음은 고부가가치 선박수주에 치중하며 선별수주에 나서고 있다한다. 회사단체로 하계휴가를 맞은 중공업의 일손은 잠시 쉬고 있었다. 내일의 충전을 위해서 란다. 이어 '방어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출출한 터라 친구가 인도하는 대로 주변의 번창하는 모습을 보며 '나룻터'로 향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생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해물(海物) 파는 아낙네들이 목청껏 손님을 유혹하며 부르고 있질 않은가. 보아하니 남편은 배를 몰아 고기를 잡아들이면 아내는 이를 시장에 파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는 듯했다.

[수산물시장에서]
횟감이라 불러다오
펄떡이는 이 놈 보소
님께서 낚은 물 좋은 놈이라서
당신께 드리오리.

영락없는 즐거움에 당신만을 노래하고
망망대해(茫茫大海)노닐 적에 한 손 그득 담아오리.
지나는 손객 보소
이놈을 낚아서리 벗에게 드리오
싱싱한 놈이라서  
님 사랑 그득하리.

종기 담은 내 살점
담백함이 으뜸이라
군침이 절로 난다 어서어서 오이소.
잔잔한 미각(味覺)에 마음마저 두리둥실
햐∼ 거참 희한하오
천하일품(天下一品) 맛이로다!
넘치는 당신이라 불현듯 둘러보고
한줌에 퍼 올린 횟감은 님 생각 절로 난다.
나 혼자 먹기 서운타고
님 얼굴 떠올까나 하오리.

파도에 실려온 사랑
떨리는 손이라오.
이 맛일랑 가슴에 쓸어안아
당신을 노래하리라!
이 몸이 다하는 날까지
널은 바다에
우정을 열렬히 태우리!

'생선횟감'을 권하는 손길마다 정성으로 얼룩진 듯, 여기저기 부르는 함성은 바다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일행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횟집을 찾아들었다. 시원스레 트여진 전망은 웅크렸던 마음을 '펼침'이 있는 듯하였다. 친구내외의 정성을 담아서 버무린 횟감에 그동안 보고팠던 우정이 '만남의 향연'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이어 일행은 '대왕암과 일산해수욕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많은 피서객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좁다란 진입로엔 들어서는 차량행렬로 옴싹달싹 못하는 신세로 변해 있었다. 간신히 샛길을 따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채  사람들은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무더위를 쫒고 있었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거나, 일부는 소나무 그늘에서 망중한(忙中閑)을 누리고, 한편에선 보트에 몸을 싣고 내달리는 등 각양각색의 취미를 벗삼아서  즐기고 있었다. 일행은 소나무 숲으로 조성된 '대왕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들어서 본즉 소나무 수령이 200-300년 이상 족히 들여다보이는 송림(松林)으로 빼곡이 들어 서있었다. 하늘 높이 찌를 듯한 숲은 바다에서 이는 바람과 맞물려 '시원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많은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펼쳐들고 이웃 간 정담을 나누며 '삶의 향연(饗宴)'을 펼치고 있었다. 송림사이로 펼쳐지는 동해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피로를 잊고 있었다.

[송림에 머무는 울산에서]
바람에 실려온 울산인가
소나무 사연에 몰려든 인파(人波)런가.
설악에 머무는 울산바위 내음이 묻어난 곳
하늘에 가려진 손등으로
내 마음을 앗는 구려!

설레는 풍차(風車)를 달았는가
이 몸마저 돌아갈 듯 하는 구려!
내달리는 보트에 듬뿍한 기운을 달아서
동해에 뿌려다오.
조용한 자락에 솔 내음 그윽하고
내 마음을 재운다.
묻어난 솔 향(香)을 머금고
피어오른 자락마다 맑은 기운으로 살아나
삶의 찬가를 부른다.

당신이 보고파서
눈 비벼 바라 볼 적
당신을 부르고 그리워하리라.
송림(松林)이 머무는 울산을∼

바닷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있고 '군 초소'들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채 있었다. 일전 남북 긴장시대엔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으로 있던 것을 남북 화해의 무드를 타고 '민간인 개방지구'로 변경 조치하여 울산시민들의 휴식처로 애용되고 있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또는 복잡할 때 찾아들면 트여진 바다와 송림의 어울림은 「감정정화(感情淨化)」로 '개운함'을 선사할 듯 하다. 번잡한 일상은 삶에 있어 긴장과 초조가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건강마저 위협하는 현실에선 가까이에 이러한 「감정정화」명당이 있음은 매우 바람직하리라. 각 도시마다 나름대로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지만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일상에 머물고 있음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곳임을 알 듯하다. 우리는 송림을 지나 괴암괴석(怪巖怪石)이 널브러져 있는 해안벽(海岸壁)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암벽에서 '바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긴 장대 낚싯대를 가지고 절벽 위에 서서 채낙(採 )하는 모습은 아슬아슬 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듣자하니 이곳에서 이따금씩 '실족사(失足死)'라든가 파도에 휩쓸린 사고가 인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의 그릇된 '설마'라는 행실로 인해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풍치(風致)을 돌아보노라니 도사린 마음에  '개운함과 후련함'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소나무와 바위의 조화는 실로 '어울림의 표상'을 이루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마음의 여독(旅毒)을 풀고 있질 않는가, 참으로 인상 적이었다. 이어 「대왕암」이 눈앞을 가른다.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반기듯 하고 고래뼈를 활용한 '환영비'가 놓여진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바다에서 더욱 세찬 시원한 바람이 몸을 에워쌈에 시원함의 절정을 이루는 듯 하다. 일렁이는 동해의 푸른 물은 파도에 낭만을 남긴 채 철썩이고 있었다. 현대 중공업에서 아치형 철교를 기증하여 설치한 내력이 있고 철교를 지나는 이마다 절벽아래에 이는 맑고 푸른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함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거센 바람과 어울려 상쾌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치 철교에서 부르는 우정]
철썩 철썩
때리는 물살에 바위는 멍이 들고
흩날리는 바람결에 내 몸을 씻는다.

아픔이 내 곁에 머물러도
너는 상처를 씻어주는 구나.
글썽이던 눈물은
한 줄기 망울 되어
입가를 적신다.

철썩이는 파도와 몰아치는 바람결에
심금(心琴)으로 우려내고
목놓아 가슴을 부른다.

삶의 질곡이 저편에 머물러도
끈적한 기운은 감동으로 다가와
야심 찬 기운을 돋우는 곳이라
그리워 그리워 찾아들어
벗 향한 일편단심
우정은 이곳에 머물러
가슴으로 피어난다.
영원히∼

바람결에 날리어 바위틈에 조아린 초목들을 보노라니 어려움을 견뎌내고 자신의 삶을 슬기롭게 영위(營爲)하는 생명력에 놀라고 있었다. 변치 않는 믿음 하나로 굳건히 견뎌내는 생명력은 우리들의 삶에 힘찬 여운으로 남는다. 가파른 대왕암을 난간을 타고 기어오르니 거센 바람과 '에머랄드빛'으로 넘실대는 바다가 일행의 상념(想念)을 앗아가고 있었다. 즉 무아지경(無我地境) 그 자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있었다.

[대왕암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 대자연의 섭리(攝理)를 터득함일까
자그만 일상에 상흔(傷痕)을 간직하고
마음에 움츠린 자들아
다 이곳에 머물지니.

정든 곳 마다하고
자신을 돌아볼 적
삶의 즐거움이 있을거나!
끈질긴 집념으로 살다가는 인생으로
자신을 거듭남이 어떨 런지.

자질한 마음으로 자신을 속죄하고
삶을 비난하는 자들아
다 이곳에 머물지니.
흩날리는 바람결에 자신을 씻어내고
아름다운 생으로써 자신을 불태우리.

영롱한 태양에 자신을 불태워서
담담한 용기로 내일을 향하고
돌진하는 파도의 기운으로
오늘을 살자므나.
끈질긴 집념은 청아(淸雅)한 자태(姿態)를 낳고
삶을 기름지어 즐거운 삶이어라.
마음으로 불러보고 정으로 맺어서
즐거움을 마음껏 향유(享有)함에
아름다움 창조하리라.
바다에 이는 파도와 바람에
오늘도 내 몸을 씻는다.

「대왕암」의 풍치를 보며 아쉬움을 가슴에 남긴 채 서서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최선을 다하는 순간에도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 아쉬움은 내일을 향한 또 하나의 진전이요 창조의 기운을 남긴다. 자연에 자신을 맡긴 채 휴식을 취하는 뭇사람들은  정담을 나누며 대왕암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일행은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쫒으며 추억의 그림자를 태우고 있었다. 친구와 헤어짐의 아쉬움을 남기며 우정어린 환대에 감사함을 전하곤, 주전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많은 피서객들이 있건만 바닷물이 차서 그런지 물가에 머물 뿐 더 이상의 해수욕은 삼가고 있었다. 머물려 하였지만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아 경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시각 에 당도하여 '박문동님'과  해후가 있었다. 졸업 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갖는 첫 만남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맛난 음식을 들었다. 야밤에 경주관광 '말 마차 탑승 경주여행코스'를 개발하여 질주하는 모습이 퍽 인상 적이다. 요금도 저렴하게 책정하여 (소인 : 3000원, 성인 : 5000원) 보문단지 내 '경주교육문화회관' 입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경주시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들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아이템에 찬사를 보낸다.  반가운 만남의 회포를 풀곤 시내 왕릉에 오르는 체험을 해보잔다.  교육적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왕릉을 조성하였던 분들의 노고를 알아볼 겸 눈높이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주인 모를 대릉인 '봉황대(鳳凰臺)'를 택했다. 묘가 어찌나 큰지 중간 언저리에 300-400년은 족히 돼 보이는 팽나무종이 4그루정도가 둘레에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이 무덤은 동산둔덕으로 여기다 1970년대에 고고학적 분석에 의하여 왕릉임이 규명되었다. "설마 높이가 얼마나 될까."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막상 오름을 시작하니 가파른 능선은 숨이 가파오기 시작했고 중간쯤에서 아래를 살펴보니 아찔하기 그지없고 스릴마저 느꼈다. 아니 눈으로 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살금살금 능선 정상에 오르니 경주시내가 한눈에 펼쳐다 보였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도구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에 엄청난 흙을 퍼날라 조성한 서민들의 고통을 느낌직하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것을 조성키 위해 희생을 당했을까?"하는 생각에 숙연함이 앞선다. 신분계급이 서슬퍼러던 시절이라 '전쟁노예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역'이란 미명아래 혹사를 당했던 것이리라. 모든 것이 육체적으로 감내하던 소시민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릉은 그렇게 서있었다. 경주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지역이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는 우리들이 늘 가까이 하는 곳이다. 아직도 수많은 유물들이 햇볕을 기다리고 있을 게다. 밝혀지지 않은 무덤이 즐비하고 목관주위에 자갈을 쌓아올리고 흙을 채워 무덤을 조성한 '적석총(績石塚)' 방식이라 도굴방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석실식 무덤'인 고구려나 백제에선 손쉽게 도굴범들이 접근하여 문화재를 훼손하였지만 신라방식은 전혀 달랐다.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곤 원형그대로의 무덤을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 선생의 삼국사기'에 서술된 왕릉의 위치에 근거한 무덤주인공을 밝혀 냈을 뿐 서술되지 않은 그 외 무덤은 파악이 곤란한 추정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사후세계 이후에도 무덤보존 가치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는 신라인들의 꼼꼼함에 놀랐다. 벽돌문화가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당나라 벽돌문화에 영향을 받은 감이 있다. 바로 「분황사지 분황탑」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탑만은 불에 구은 찰흙벽돌로 쌓아 조성된 '모전탑'방식이다. 또한 중국은 벽돌문화의 활성화로 '불탑부터 만리장성에 이르기까지' 조성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목조양식에 치우치다 보니 습기와 벌레 그리고 전쟁 등으로 부식에서 화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손실로 오래도록 보존이 불가능하였다. 이는 돌아보면 훗날에 오래된 건축물이 유럽이나 중국에 비해 미약하게 존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안타깝다. 곁에 '천마총'이 있는데 주인공을 모르는 거대한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관을 비롯한 말안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통명 출토된 말안장 그림'천마'를 보고 '천마총'이라 불렀다. 이처럼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유물이나, 그림, 지역 명을 들어 명칭을 부여해오고 있는 것이다.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여장을 풀고 경주의 밤을 꿈속에 그리고 있었다. 날이 밝아 우린 경주를 떠나 영천 국도 길을 따라 달렸다 한참이나 올 무렵 '만불사' 안내 표지가 있어 잠시 들릴 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에 금동탑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환영푯말과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잠시 서명을 하고 불당에 들러 불도의 예를 다하고 둘러보았다. 불교 TV에 방영되는 영천 만불사(萬佛寺)였다. 불로장생(不老長生) 기원하며 영면(永眠)이 거(居)하는 곳으로  부처님의 자비(慈悲)로 생을 살고 윤회사상(輪回思想)의 근본을 살린 사찰로서 일반 불도인 들의 사후영락세계를 염원하며 사리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였다. 다양한 사연으로 운명을 달리한 중생(衆生)들을   '붓다'의 사후세계를 영락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날까지 삶은 찰나(刹那)  즉, 「눈 까박임」에 불과하다 했다. 이는 삶(사바세계)이란 운명은 그만큼 짧으니 부지런히 살라는 의미며 나아가 불멸의 세계인 '영락의 세계(붓다세계)'로 거듭남을 뜻하기도 하다, 식당에 들러 봉복을 하니 입맛이 영∼ 아니었다. 음식이 싱겁고 밥알이 흐물거려 참 힘들었다. 그곳을 둘러보니 '금동와불상과 입상'이 크게 조성되어 '점안식'을 거행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했다. 모쪼록 '붓다 세계'로 인도하는 범생(凡生)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와 은덕이 늘 함께 머물길 기도 해본다.  우리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영천을 지나 팔공산 자락 군위군 '군위삼존불'에 들러 불도의 예를 다하고 산 중턱 석굴에 안치된 '삼존불'을 바라보았다. 이를 '제2 석굴암'이라 부르고 있었다. 중턱마루에 위치한 석굴에 수많은 불도들이며 관광객들이 드나들며 만지는 바람에 손상을 우려 철문으로 폐쇄하고 발치에 수도장을 마련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주변의 숲은 잘 보존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 우리는 의성 I/C를 진입해 중앙고속도를 타고서 예천 I/C를 빠져 나와 34번 국도를 타고 충주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예천을 지날 무렵 「산택 연꽃 못」을 찾아들었다. 일 만평 족히 돼 보이는 이곳은 예부터 연꽃 못을 이뤄 잔잔한 정취를 느끼는 곳이다. 예천시에서  주변 정자를 정돈하여 길가 쉼터로써 훌륭하였다. 한가로이 머물며 점심을 끓여 먹었다. 연꽃 주위엔 논병아리들이 번식하여 많은 수생식물과 함께 공생하고 있었다. 언저리 논에선 '오리사육을 통한 무농약 벼농사 시범단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리도 치고 벼농사도 거두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본다. 여독을 풀고 문경쪽으로 치달았다. 문경새재입구와 무인시대 촬영지 임을 안내하는 문구들로 가득차 있었다. 60-70년대에 석탄연료의 시대 경기활력의 중심지였건만 90년대 들어 천연가스와 석유연료의 대체활용으로 인한 석탄수요의 급격한 감소로 석탄경제 추락과 함께 문경경제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지방자치시대를 맞은 문경시에서 적극적인 지역경제 살리기 일환으로 '역사극방송 촬영지'를 조성하여 대대적은 지원활동을 편 결과 훌륭한 문화적 유산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관광적 측면'을 고려한 적극적인 개발이 필요함을 보여 주었다. 한편 특산품 매장을 두어 '도자기'로 문경문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여주· 이천만을 떠올리며 도자기를 연상하지만 '문경도요' 또한 유명함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에 뒤늦게나마 문경시에서 도자기 홍보에 집중하고 있음을 다행이라 여긴다. 일행은 '이화령' 고개를 곁에 두고 '문경터널'을 지나 금왕-일죽을 지나 평택으로 돌아왔다. 기나긴 여정을 바삐 돌아봄에 아쉬움이 남는다. 평택에서 일정이 바쁜 관계로  충분한 휴식을 하지 못한 것이 가족에게 미안하다.

4. 여행을 다녀와서
우선 가족여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고 우정을 함께한 울산의 영원한 벗 '정윤영 내외분', 경주의 질퍽한 우정 '박문동 내외분', 그리고 끝까지 불편을 감내한 가족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행을 통한 우정의 만남 그리고 삶의 현장'을 통한 자아(自我)를 깨닫기 위한 하계가족여행 테마는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흘러가는 삶을 자신의 바른 '깨달음'을 얻고 내일을 향한 도전과 창조정신으로  활기찬 미래를 열어갈 것입니다. 우정 만남을 통한 가족여행의 밝은 미래가 있음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가족 모두를 보며 제 삶에 대한 성찰(省察)을 해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만남의 향연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의 앞날에  행운과 축복이  늘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2003년 8월은 우정의 만남으로 깊어갑니다.

우정 만남을 통한  삶을 돌아보며
깊어 가는 여름밤에 쓰다.        
2003년 8월 4일
常天 허응만
  
여행일 : 2003.8.2(토)∼8.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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