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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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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영학
설 연휴 마지막 날 우리는 100년 만에 돌아왔다는 의궤를 보기 위해 경복궁으로 갔다. 워낙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필자는 속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가족들이 다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100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로 반환된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관심이 가기도 했다. 여하튼 점심을 먹고 우리는 모두 고궁박물관이 있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서울로 가는 것인지라 두근거리고 설렜다. 아파트 숲을 넘어 커다란 한강을 지나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에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무관 차림을 한 수문장들이 6명 정도 서 있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고 있어서인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넓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관광객도 있고 일본인 관광객도 있었으며 미국인 관광객도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 단체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복궁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문화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고궁박물관도 각종 외국인들과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궁박물관에서 제일 처음 본 것은 프랑스에서 우리나라로 의궤가 도착했을 당시의 모습을 만들어놓은 모형이었다. 박물관에 별 흥미를 가지지 않던 나였지만 그 모형을 보고 프랑스에 우리나라 문화재를 멋대로 자기네 나라로 가져간 것에 대한 분노와 이렇게나마 우리가 의궤를 볼 수 있게 해 준 것에 고마움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고궁박물관에는 의궤뿐만 아니라 금보, 은보, 옥보와 같은 인장들과 왕좌와 병풍을 비롯해 궁궐을 꾸며주는 여러 장식품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영조가 정조에게 쓴 유세손서가 인상 깊었다. 세손의 효를 칭찬하고 세손에게 앞으로 나라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영조가 쓴 글인 줄 몰랐다. 하지만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의 임금이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나서 83세까지 산 임금은 영조밖에 없기 때문에 영조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사용하는 인장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1품의 인장의 크기가 가장 컸으며 종9품이 가장 작았다. 그리고 임금은 금도장과 옥책을 받고 세자는 옥도장과 죽책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책에는 글자 중간 중간에 빨간색 종이로 가려져 있었다. 왠지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것 같아 비밀편지를 보는 듯했다. 알고 보니 임금의 이름은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가려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왕실과 관리들의 도장과 글들을 본 후에 본격적으로 의궤를 보았다. 의궤는 왕의 가족들의 생일을 비롯해 종묘제례악과 각종 제사와 혼례, 상 등에 대해서 세세히 기록하고 묘사해 놓았다. 게다가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다. 지금 우리가 봐도 한눈에 거의 다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잘 그려져 있었다. 의궤에 그려진 그림만으로도 사극처럼 위엄 넘치는 임금 앞에서 양쪽으로 서 있는 문무관들과 그 주위에 있는 악공들과 춤꾼들이 눈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인 186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약탈당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완전히 우리나라의 것으로 되돌아 와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대여’를 한 상태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우리가 대여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분통 터지고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나마 의궤는 ‘영구대여’로 볼 수라도 있으나 그 외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일본, 중국을 비롯해 세계에 있다. 심지어 지금 우리의 문화를 중국은 ‘동북공정’을 들이대며 빼앗으려 하고 있다. 의궤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우리의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정신을 놓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