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맑음>>
'장마'를 읽고나서....
기억속의 희미해진 추억을 하나 둘 거슬러올라가 보자면, 비를 유난히도 싫어
하는 한 꼬마의 모습이 있다. 어린시절, 비를 유난히 싫어하던 나로서는 장마
란 정말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친구들과 밖에서 맘껏 뛰놀지도 못하는 하루는
그 어찌나 길던지... 더구나 비오는 날의 잿빛하늘은 평소의 푸르기만 하던 하
늘과는 다른 것이어서, 왠지 모를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듯 했다. 이런 이유에
서인지 나는 장마를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이 책의 첫장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도 창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처음 도서목록에서 이 책 이름을
발견하고, 문득 황순원님의 소나기가 떠오른 것은 왜인지. 나는 이유모를 호기
심이 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읽게 된 이 책은 소나기와는 전혀다른 느낌으로,
그러나 내게 기대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는 책이었다.
한 지붕 두 가족. 여기 한 지붕 아래 한 사람은 국군으로, 또 한 사람은 인민
군이란 이름으로 각기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아픔을 겪게 된 사람들이 있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날 밤, 국군으로 전쟁터로 나간 외삼촌의 전사소
식에 온가족은 그만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그 후부터 아들을 잃은 외할머
니는 인민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바람에 그만,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친할머니
의 곱지 않은 눈길을 산다. 왜냐하면 친할머니에게 있어 외할머니의 저주는 인
민군으로 있는 자신의 아들을 향한 저주와도 같았으므로.
대체 무엇이 이렇듯 서로 돈독하기만 했던 두 노인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일까?
서로서로 그렇게나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던 두 분인데...나는 그만 마음 한구
석이 울적해져 버렸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한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등을 돌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
란 걸. 그것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위에 빨간줄로 두동강 나 있고 서로
를 향해 총을 겨누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마을사람들과 가족들은 대부분 친할머니의 아들, 곧 삼촌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중 한 명 할머니만은 '아무 날 아무 시'에 아무 탈없이 돌아온다는 점
장이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삼촌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그 뒤의 실망
도 큰 법. 시간이 되었건만 삼촌대신 우리를 찾아온 건, 바로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였다. 순간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그 어찌나 놀랐던지. 하지만 이런
나를 더욱 더 놀라게 한 건 바로 구렁이를 대하는 외할머니의 태도에서 였다.
마치 삼촌이 돌아오기라도 한 양 밥상까지 차려가며 따스하게 대해주는 태도라
니. 하지만 난 곧 코끝이 찡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민군들을 향해
다 나가 죽어라고 저주를 퍼붓던 외할머니가 인민군인 삼촌을 이토록이나 따스
하게 대해준다는 건, 결국 그를 한 가족임을 인정하고 감싸 안아주는 것과 같았
기 때문이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던 두 할머니는 이 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어느새 지루하기만 하던 장마도 그치었다.
나는 전쟁 속에서 살아보지도 않았고, 아직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았기에 자식
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자식을 잃
은데 이어 구렁이로 변한 아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친할머니의 묘하게도 닮은 슬
픔은 제 코끝을 그만 찡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우리는 내 나라임에도 내 나라 땅을 밟지못하는 현실 속에 서 있다. 서
쪽 바다에서는 난데없는 총성으로 젊은 청년들의 목숨이 사라져가고, 수많은 이
산가족들이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면서...
이 책장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어느새 비를 다 떨궈낸 하늘을 보았다. 그
리고는 곧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내가 언제 흐렸냐는 듯이 그 전보
다 오히려 더 영롱한 햇살 한 움큼을 내비추는 하늘. 그 하늘을 보며 앞으로는
비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하늘 속에너 나는, 지은이
가 이 글의 제목을 왜 장마로 했는지 어렴풋히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 속의 두 할머니가 서로가 서로의 주름진 손을 꼭 잡으며 화해했을 때 지
루했던 장마가 끝이났듯이,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지루한 장마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50년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장마 끝에서, 언젠가는 밝고 뽀
오얀 햇살 한 움큼이 그 고개를 내비출 그 날,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
이었지 않을까? 문득 내 귓가를 간질이는 서늘하고도 따스함이 묻어나는 바람
을 느끼면서 내일은 온 세상이 맑았으면 좋겠다는 바램 하나를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