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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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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과 가르침의 시학
이재선(문학평론가·서강대 교수)
■ 형성적 교육소설로서의 <무정>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 <무정>(1917)은 전환기적 가르침의 담론에 근거하고 있는 여성 성장 교육소설이다. 부권적(父權的)인 사회체계로부터 여성 개체의 근대적인 각성의 삶으로 나아가는 형성의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적 성격을 보다 엄격히 말한다면, <무정>은 성장소설과 교육소설 및 시련소설과 광의의 이데올로기소설의 복합체적 성격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 더 바른 지적이 될 것이다. 이같은 성격의 복합성 때문에 읽기와 해석의 양상도 그만큼 다를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여주인공인 박영채의 삶의 편력과 그녀의 세상에의 길 가기의 서사프로그램이 주도적 구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장소설과 교육소설의 복합체인 형성적 교육소설로서의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상편이 주로 일련의 시련의 시퀀스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 비해서 하편은 계몽주의적인 형성의 이데올로기와 시퀀스로 이루어짐으로써 다분히 패러다임의 변이나 쇄신이란 진화론적 과정이 서사전략으로 배려되어 있다. 박영채의 삶은 아버지와 오빠들의 무고한 투옥으로 인해서 행복했던 가족의 목가적 상태가 해체됨으로써 불가피한 시련의 운명에 빠져든다. 어린 나이에 고아상태가 되어 버린 그녀의 삶의 도정에는 겁탈의 위기-기생으로의 변신-겁탈(순결상실)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련이 중첩되고, 마침내는 평양으로의 자살행이란 악화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이 신문명의 한 징표인 기차 여행은 영채의 운명의 결정적 전기가 되며 여성의 근대적인 삶으로 전화하게 하는 이행의 축이다. 여성의 구조적 열성화를 비판하는 개화된 신여성인 김병욱과의 만남에 의해서 여성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새로운 개안과 각성을 얻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이 만남과 교화에 의해서 영채는 마침내 여성이 배제되는 전통적 가치규범에의 갇힘으로부터 의식이 독립된 새로운 개체적 여성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김병욱은 성장소설이 필수적 요건으로 하는 교화자 내지 선도자인 것이다.
M. 허쉬는 성장(형성)소설의 특질을 밝히는 글에서 이런 교화자의 존재와 인물의 수동성, 사회의 교육장화, 주인공의 교육 묘사에 의한 독자 교육의 교훈성 등을 지적하고 있는데, <무정>은 바로 이런 성장소설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휘론적으로 '가르치다'란 서술어의 빈번화 현상이 제기하는 전환기 문학의 교화론적인 담론 양상 또한 성장교육 소설의 한 자질이다.
■ 아버지의 이름과 몸의 정치학
인간의 몸이 소설 속에 편재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 비평은 기호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각별하다. 몸이 문화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텍스트인 <무정>은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인지의 각별함을 통해서 여성의 배제 또는 열세화가 현저한 전통문화의 부권적인 가치규범 및 가족체계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즉 전통문화내에 있어서의 여성과 그 몸에 대한 사유 및 그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여성의 몸과 성의 정치학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채가 배 학감으로부터 입게 되는 겁탈 폭행과 함께 영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절관 내지는 몸에 대한 인지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13세 때의 남장(男裝) 비밀이 탄로남으로써 일차적인 겁탈의 위기에 있었던 영채는 십여 년 뒤 19세의 기생으로 이형식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 배 학감 등에 의해 청량사에서 겁탈당한다. 이로 인해 자살을 감행코자 하며 이형식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의 편지를 남긴다.
"이 몸은 옛날 성인과 선친의 가르침을 지키어 선친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 몸을 허하신바 선생을 위하여 구태여 이 몸의 정절을 지키어 왔나이다. (……) 그러나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약하고 외로운 몸이 애써 지켜오던 정절은 작야에 수포(水泡)에 귀(歸)하고 말았나이다. 이제는 이 몸은 천지가 허하지 못하고 신명이 허하지 못할 국흉곡악한 죄인이로소이다. 이 몸이 자식이 되어 어버이를 해하고, 자매가 되어서는 형제를 해하고 아내가 되어서는 정절을 깨뜨린 대죄인이로소이다. 선생님이시여! 이 몸은 가나이다."
이 겁탈 및 그와 관련된 편지 속에는 전근대적 전통사회 속에 내재하는 두 개의 문제점이 함축되어 있다. 그 하나는 남권 우위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공격과 겁탈의 위협으로서의 폭력이 외현적으로 편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둘은 여성 자신의 신체관인데, 여성 자신이 자신의 몸을 부권이나 가족체계 속에 묶어 버리거나 가두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이요 아버지의 가르침과 법이다. 아버지는 곧 금지의 원리이며 법의 원천이다.
영채는 학교라는 근대적인 공공의 외계(外界)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구조가 지배하는 가정 내에서 받는 유교적인 가치를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가치로 하여 살아왔기에 이런 아버지의 법칙에 의거해서 몸의 정절을 지킨다. 정절이란 곧 부권적 가치와 가문의 표상이다. 여성이 정절을 겁탈당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파괴나 유린을 의미할 텐데, 영채는 정절의 훼손을 곧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모독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자살행으로 이행하게 되는데, 정절을 둘러싼 자살의 이런 여성화 현상은 전근대사회의 사유나 상상력에서 '효(孝)'와 '열(烈)' 또는 '정(貞)'의 가치 코드로서 넓게 자리잡아 왔던 현상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가치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바로 김병욱이 주장하는 부권구조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관한 새로운 담론이다. 여성과 모성의 몸에 대한 억압이나 사회적 배제를 벗어나려는 추구인 동시에 남녀의 개체적인 관계의 소통과 여성적 욕망 및 성적 자유에 대한 근대적 지평을 뜻한다. 이를 교화적 매개로 해서 영채는 마침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 감정구조의 팬드럼 현상
<무정>을 읽을 때마다 결코 간과해 버릴 수 없는 문제는 남자 주인공인 이형식이 지니고 있는 감정구조의 양면성이다. 이 양면성의 문제는 어쩌면 이광수 소설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서사적 매트릭스로서 지적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고아 출신인 이형식의 마음과 태도는 분명히 팬드럼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하는 진자운동 또는 그네타기 현상은 영채와 선형을 양축으로 한 감정의 삼각구도에서 가장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저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다.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다.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한번 영채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는 거룩하다고 할 만한 슬픈 빛이 보인다. 형식의 마음은 또 변하였다."
"형식은 눈을 감고 한번 더 영채의 모양을 그리면서 싱긋 웃었다. 도리어 저 김장로의 딸 선형이도 그 얌전한 태도에 이르러서는 영채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도 얌전치 아니함이 아니언마는 영채에게 비기면 변화가 적고 생각이 적다 하였다."
이런 문맥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이형식의 정서적 특질은 불확실한 감정의 상태에 있으면서 호, 불호가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고 있다. 정서나 정념 자체가 변덕스럽고 쾌감과 불쾌감을 넘나드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주체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같은 인물의 불확실성의 감정 또는 변덕의 정념을 제시함으로써, 아마도 작가는 서사적 대비나 심리적 내면상태를 표출하는 방법의 구현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흔들림과 불확실의 감정구조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이 바로 과도기적인 사회구조에 반응하는 감정의 구조를 시사한다는 점이다.
■ 생각의 내면성과 시간의 역전화
<무정>을 이루고 있는 언어를 꼼꼼히 따져 보면 '생각'이란 어휘소가 실로 엄청나게 많이 등장한다. 이전의 소설이나 서사문학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형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형식은 '아뿔사! 내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약하던가'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어 이러한 약한 생각을 떼어 버리려 하나……"
'생각'의 어휘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비록 전지적인 시점의 확대 현상이긴 하지만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인물의 내면성이나 심리주의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이다.
한편, <무정>에서 긍정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시간형상의 시학에 있어서 시간의 역전(逆轉)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서사적 과거 행동 및 서술적 현재로부터 과거로의 전이를 뜻하는 것으로, 직선적이고 순진적인 시간의 진행을 존중해 온 조선시대의 전기(傳記)류 소설에서는 매우 드문 형태이다. 이런 조선시대의 전근대적 소설에서는 찾기 어려운 시간적 역전의 현상이 <무정>에서는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채와 이형식의 지나간 과거의 삶이 서술자나 인물의 회상의 가늠자에 의해서 거듭 제시된다. 이것은 한국소설의 시간 서사학에 있어서 근대성으로 편입하는 큰 변화로서의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한승희 국어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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