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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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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락원》 9편 25행 이하에서 “내가 처음 이 영웅시의 주제에 마음 끌린 이래 그 선택은 오래였고 그 시작은 늦었으며, 지금까지 영웅시의 유일한 주제라고 생각된 전쟁을 노래하는 데 천성적으로 나는 마음 내키지 않는다” 라고 술회한 그대로,《일리아드》《아이네이스》정도의 대작을 써보겠다는 의도는 학생 시절부터 갖고 있었지만, 그가 애초에 구상했던 중세기의 로망스류나 아더왕 전설, 또는 맥베드 설화 같은 것을 꾸며 보려던 생각을 버리고, 보다 엄숙하고 보다 근본적인 악의 문제를 선택하기까지에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인류의 타락을 주제로 한 현재와 같은 《실락원》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65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고 그것이 집필 완료된 것은 1663년 가을이었다. 그러나 페스트(1665)와 런던의 대화재 (1666)로 말미암아 출판이 늦어져 1667년 4월에야 비로소 출판업자 사무엘 시몬즈와 출판계약을 맺고, 초판을 내놓게 되었다. 초판은 10편 (10.550행)이었지만, 이보다 7년 후인 1674년 재판할 때에는 12편(10.558행)으로 재편되었다.
《실락원》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매우 방대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것은 〈창세기〉 1∼2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와 〈요한의 묵시록〉 12장에 나오는 하늘 싸움에 대한 예언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서사시엔 이러한 성서의 구절들이 수없이 삽입되어 있고, 또 고전에 정통한 학자라도 현혹을 느낄 정도로 번거롭게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그 밖의 여러 사상에 대한 지식이 나열 또는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시나 산문이나 거의 일반 독자로서는 읽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삽하고, 또한 쉽사리 접근하고 공감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실락원》이 성공했다면, 그것은 성서적 주제를 다룰 때 흔히 빠져들기 쉬운 단색의 빛에다 고전의 깊은 맛을 가미해 준 데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인간의 운명과 신의 도리라는 장대한 문제를 고전적 전통의 빛을 가지고 조명해 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만일 서사의 정신 면에 있어서나 그 구성과 스타일 면에 있어서 고전적 전통을 거절했다면 오늘의 《실락원》만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의문스럽다. 아마 오늘의 그것보다는 평이하고 단조로운 것이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불후의 고전으로 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락원》은 오히려 인류문화의 두 원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합하여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기에 더욱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실락원》을 바로 이해하고 해설하자면 이 양면을 다 포섭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성서적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파상적으로 설명해 나갈까 한다.
1. 밀턴의 신
밀턴의 신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한을 채우는 자〉(《실락원》 7편 168∼9)다. 즉 아담과 나누는 라파엘의 대화(《실락원》 5편 469∼79)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고 종국에는 다 그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이를테면 근원자라는 것이다. 다른 곳(《실락원》 5편 509∼12)에서는 그 만물의 근원을 한 원의 중심에다 비유했다. 창조주 하느님이 그 중심이라면 창조된 만물은 그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원주라는 것이다. 원주를 이루는 하나하나는 그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 안에 있게 되므로, 한 원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능력이나 지식의 바깥에는 있을 수 없다.
얼른 보면 그 원이 하도 크고 넓어서, 다시 말하면 중심과 둘레의 거리가 하도 멀어서,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중심에게까지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하나 정관해 보면 그 어느 하나도 전지전능한 신(중심)의 지식 밖에 있는 것은 없다고 밀턴은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그는 《실락원》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하늘 그 높은 곳에서 우리의 이 헛된 제의 보며,
비웃을 게요.
―《실락원》 2편 191∼2
지금 전능하신 하느님은 저 하늘 위에서,
.............................
그 지으신 만물과 그들이 하는 일을 모두 한꺼번에
보신다
―《실락원》 3편 56∼60
하느님은 과거·현재·미래가 내다보이는...................
―《실락원》 3편 77
도대체 만물을 투시하는
하느님의 눈을 어찌 피하고, 전지하신
그 마음을 속일 자 어디 있으랴.
―《실라원》 10편 5∼7
이와 같이 《실락원》의 하느님은 가장 기묘한 사상마저도 분별할 수 있는〈영원의 눈〉(《실락원》 5편 711 이하)이요, 장미빛 이슬이 만물을 휴식으로 이끄는 한밤에도 온 우주를 지켜보시는 〈잠자지 않는 눈〉이시다. 이런 비유들은 곧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그 만드신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시며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쇠사슬에 묶여 불타는 호수에 뻗어 있는 사탄까지도 하느님의 예지권을 벗어날 수 없다. 《실락원》 1편 209∼20행을 보면 만사를 경륜·섭리하시는 하늘의 뜻이 암흑의 흉계를 제멋대로 행하도록 사탄을 내버려 두셨다. 그것은 오히려 유혹당한 인간에게는 무한한 선과 은통과 자비를 베풀고 흉계를 자행한 사탄에게는 그 이상의 파멸과 분노의 소나기를 내리기 위한 것이니, 어둠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나 그곳에서 벗어나 암흑의 흉계를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 사탄의 자의적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악행이나 인간의 타락을 모두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예방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적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 밀턴은 신이 무지하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지음 받은 자―사탄이건 인간이건―의 자유의지를 절대 존중하되 종국에는 자신의 최종적 뜻에 굴종시킴으로써 악으로부터 선을 만들어 내고 보다 나은 은총을 베풀어 주고자 하는 위대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물의 근원자이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를 늘 베풀어 주시기를 좋아하지만, 일면 그의 공의는 엄정하고 강렬해서 스스로 세운 어떤 법칙도 파괴할 수 없고, 일시적으로는 악행까지도 버려두시지만 그 형벌을 완전히 말소해 버리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언제든 악은 형벌되고 선은 승리하게 된다. 이런 하느님의 정의는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 인간의 죽음을 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비는 죽음의 형벌을 영원한 구속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외아들 예수를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실락원》 11편 61행의 ‘죽음은 최후의 구제가 된다’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준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구속을 통하여 자비와 정의를 조화시키신다.
2. 밀턴의 인간
밀턴의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받은 존재다. 그런데 《실락원》에 보면 아담의 거룩한 얼굴에 빛나는 창조주의 보습은 지혜와 거룩함과 의로움이라 했으니 ( 4편 291∼5), 결국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원초적으로 완전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타락 이전의 사람의 원시 상태가 완전했다면 어떻게 타락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게 된다. 이에 대해 밀턴은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죄 없고 ( 6편 61, 9편 659), 순진하고 (4편 11, 313, 320, 5편 209, 384, 445∼6, 9편 373, 411, 459), 바르고 (5편 524), 순결하게 (5편 109, 8편 506, 623), 즉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완전은 절대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대를 완전하게 만드셨으되 불변한 것으로
만드시지는 않았느니라. 그대를 선하게 만드셨으나
참고 견디는 것은 그대의 힘에 맡기셨으니,
―《실락원》 5편 524∼6
다시 말하면 지음받은 인간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완전성과는 달리 상대적이요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조0건은 무엇인가. 그 조건은 단 한가지 순종뿐이었다(《실락원》 4편 420∼24참조).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순종하고 지키면 그 완전성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만일 불순종하여 그 금령을 지키지 않으면 완전하게 만들어 졌어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금령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그들의 순종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였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모든 만물을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반면에 한 가지 손쉬운 충성, 곧 순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에 세워진 사랑의 법이기도 했다. 이 사랑의 법을 어기거나 떠날 때 창조의 질서는 파괴되고 그 법을 세운 자에 대한 불순종이 되므로, 이 사랑의 법을 버린 자는 완전성을 유지할 수 없고 마침내는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실락원》 5편 538 이하 참조).
그러나 그 사랑의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즉 순종하고 안 하고는 순전히 인간의 자유의사에 맡기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을 때, 그에게 또한 선택의 자유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순종은 이성적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올바로 이루어질 때 참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이성적 선택에 의한 순종을 통하여 얻어지는 자유가 아니고 어떤 강제나 필연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유라면 참된 자유라 할 수 없다.
자유가 선택의 자유라면, 필연적으로 그 속에는 악에 대한 선택의 가능성도 내포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유로이 하느님의 법도를 따를 수도 있고, 또한 자유로이 선을 거역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향유할 수 없는, 필연을 위해 봉사하는 인형이 되고 만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 이런 악에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혹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유는 필연적으로 유혹의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유혹이 없는 곳에는 자유도 없다. 만일 낙원에 금단의 나무가 없었다면 아담의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금단의 나무열매는 아담 속에 내재하는 반역에의 가능성을 상징하고 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적 오류에 의해 타락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완전성을 상실케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생각하고 지배하는 요소가 있는 반면에 그것에 지배를 받고 순종하여야 할 요소가 있다. 사색하고 다스리는 요소를 이성이라 한다면, 지배를 받고 순종하여야 할 요소는 감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밀턴에 의하면 아담은 이성이 강하고 하와는 감성이 강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성이 같지 않은 것처럼 동등치 않다.
남자는 사색과 용기를 위하여,
여자는 온순함과 달콤하고 매력있는 우아함을 위하여
.............만들어졌도다.
―《실락원》 4편 296∼9
《실락원》의 8편에도 보면 창조의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곧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놀라움과 기쁨으로 위대한 창조주를 찬양했지만, 하와는 자기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즉 아담은 이성과 지력을 통해 즉시 자기와 신과의 관계를 바로 인식했지만, 하와는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오직 반사의 빛을 통해서만 자기의 생을 볼 수 있었다. 이로 보아도 아담은 이성이 강한 존재였고, 하와는 감성이 강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성이 감성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존재구조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거기서 타락이 비롯되는 것이다. 《실락원》을 보면 감성적 존재인 하와가 이성적 존재인 아담의 지배를 떠나 홀로 있을 때 뱀은 그녀를 유혹했고, 유혹받은 그녀는 쉽사리 그 꾐에 넘어가 급기야는 금령을 범하고 마는 것이다. 한편 하와가 가장 비극적인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담은 그녀 없는 세상은 황야 같을 것이니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결심 아래 하와가 권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한 사람의 행위 같기도 하지만, 실은 다스릴 요소가 다스림을 받아야 할 요소에게 굴복하는 것이 된다. 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되므로 영혼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그로부터 죄는 싹트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결국은 다스릴 자와 다스림을 받아야 할 자의 관계로 말할 수 있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세운 한 가지 금령은 그 관계를 표상적으로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는 그 지켜야 할 창조자와 피조자와의 거리, 그 유지하여야 할 정당한 관계를 망각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제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불순종이며, 이 불순종이 곧 타락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대적으로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던 인간은 그 완전성을 상실하고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
타락의 결과 하느님의 정의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렸다. 죽음은 육체적이요, 정신적이요, 도덕적이었다. 곧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었지만, 범죄를 함으로써 육체적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고, 동시에 정신적 죽음, 원초적인 슬기로움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귀한 은사이던 완전성을 상실하게 되는 마음의 동요가 생기고, 순수한 사랑이 아닌 정욕이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로는 도덕적으로 죽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자비로써 죄지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특수한 은총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서로 용서하며 두 손을 마주 잡고 에덴의 동쪽으로 향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구원의 약속이 희망의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지을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시련을 겪고 끝까지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 그대로 구원의 가능성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극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밀턴은 믿었다. 믿음 없이는 낙원을 되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3. 밀턴의 자연
밀턴은 우선 자연은 〈만들어진 자연(natura naturata)〉과 〈만드는 자연(natura naturans)〉 즉 신으로 구별된다고 하는 전통을 그대로 수용했다. 《실락원》 2편 1037∼8행을 보면 ‘여기서 자연은 비로소 그 아득히 먼 변두리를 열고 혼돈은 물러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은 혼돈으로부터 창조된 조화의 세계라는 말이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자연을 초월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자지만, 자연은 피조물로써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신의 질서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자연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질서의 공간은 에덴 낙원이다. 다만 그 질서가 끝까지 유지됐더라면 아담에게 그 심각한 윤리적 긴장을 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밀턴이 묘사하는 에덴 동산이 분명 질서의 공간임에는 틀림없지만, 문학적 낙원으로서는 좀 지나칠 정도로 풍요한 곳 (《실락원》5편 295∼7, 4편 241∼2 참조)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에덴 동산은 신의 창조의 중심으로서, 질서의 세계인 동시에, 그 풍요한 아름다움의 배후에, 질서를 파괴하려는 반질서적인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에덴 동산은 질서와 반질서가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윤리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련의 장소요, 유혹의 동산이었다. 바른 윤리적 결단은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아담은 그 이성을 감성에게 넘겨줌으로써 결국 바른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반질서적인 것의 주인공인 사탄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반질서적인 것이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이 자연은 그들의 행복한 결혼을 함께 누리며 기뻐하지만 (《실락원》 8편 511∼22), 그들이 금단의 실과를 따먹었을 때 자연은 신음하며 탄식한다(《실락원》 9편 782∼4, 999∼1003), 이런 자연의 신음과 탄식은 자연계의 반질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존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인간계의 무질서는 곧 자연계의 무질서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조화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자연은 무질서한 상태가 되었으니, 곧 본연의 아름다움과 축복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실락원》에 보면 독수리가 새를 쫓고 맹수가 암사슴을 쫓는 살벌한 약육강식과 처절한 전투와 문란한 행위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밀턴이 질서의 추구를 중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밀턴이 추구한 새로운 질서는 무엇인가? 《실락원》의 11편, 12편은 인류의 미래사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역사의 서술은 구속사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죄로부터 사죄로,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멸망으로부터 구원으로 이행되는 패턴으로 기술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미래적인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가 반질서적인 세력의 두목인 사탄을 쳐서 물리칠 때 비로소 잃었던 질서를 되찾게 되고, 인간과 자연계에 새로운 아름다움과 행복이 돌아오리라고 한다.
4. 밀턴의 시간
인간은 시간적 존재지만,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다.(《실락원》 3편 77∼8). 그래서 그의 눈은 잠자지 않는 눈이요 (《실락원》 5편 647), 그의 의지는 운동보다도 훨씬 빠르다(《실락원》 7편 176∼7)고 묘사된다. 또한 그리스도도 시간을 초월해 있다고 할수 있다(《실락원》 10편 90∼1). 그러면 하늘에는 시간의 질서는 없는가? 물론 시간을 초월해 있는 신에게는 시간의 질서 같은 것은 필요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장 라파엘이
시간은, 영원 속에 있으나, 운동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현재·과거·미래에 의해 지속되는 사물을
측정하는 것이니
―《실락원》 5편 580∼2
라 한 것을 보면, 영원의 세계에도 시간의 순서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연한 시간과 운동의 감각은 아담이 거주한 세계, 즉 신이 창조한 거대한 구형의 우주에서 한층 뚜렷한 형태로 느낄 수 있다. 이 우주의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교체를 정한 것은 신의 최초의 창조행위였다(《실락원》 7편 339∼41). 사실상 시간은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그러면 그 전에는 시간은 없었는가? 물론 천지창조 전에도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시간이 아니라 신적인 시간, 즉 영원이었다. 아무튼 낙원의 시간은 천상의 시간보다는 정확하게, 또한 동적으로 표현된다. 사탄이 낙원에 진입한 날의 묘사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탄이 지구에 이른 것은 정오(《실락원》 4편 29), 그날 오후 6시 태양의 위치와 운동은 이렇게 묘사된다.
마침 하늘과 땅이 대양에서
맞닿는, 서쪽 끝으로 지는 해는
서서히 기울어져
낙원의 동쪽 문 바로 정면 향하여
석양의 햇빛을 쏟는다.
―《실락원》 4편 539∼43
태양은 서쪽 끝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 광선은 마치 시계의 바늘처럼 정확하게 낙원의 동쪽 문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은 저녁 9시의 밤하늘을 묘사한 대목을 들어보겠다.
밤은 이미 원추형의 그림자 거느리고, 이 거대한
달 밑 하늘 언덕길 중턱에 이르렀다.
―《실락원》 4편 777∼8
여기서 말하고 있는 <원추형의 그늘>은. 태양 광선에 의해 우주공간에 투영되는 지구의 그림자다. 다시 아침의 해뜨는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
태양은 솟지 않은 채
바퀴 끌고 태양의 변두리를 배회하며,
이슬 비추는 햇살을 대지에 나란히 쏟아
-《실락원》5편 139∼41
라 되어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낙원에 있어서의 시간의 흐름은 천체의 운동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아담의 주위에는 구형의 우주가 있고, 그 우주에서는 무한한 천체가 밤낮으로 쉴새없이 정연하게 원운동을 계속했다. 우주에 있어서의 시간의 질서는 그 바깥쪽의 혼돈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혼란과는 대조를 이룬다. 혼돈의 세계는 〈시간도 장소도 없는〉(《실락원》 2편 894) 세계요, 〈혼돈〉과 함께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실락원》 2편 910)이다.
천체가 회전한다고 하는 (《실락원》 8편30∼31) 인식으로부터 생기는 시간의 의식은 순환하는 시간, 즉 불변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만물의 판은
우미와 계절을 춤으로 결합시키며
영원한 봄을 끌어들인다.
―《실락원》 4편 266∼8
여기서 춤을 춘다고 한 것은 시간의 주기적 진행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간의 추이는 사계의 변화를 갖지 않고, 다만 영원의 봄 즉 일정 불변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아담은 시간을 순환적 흐름으로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선적 흐름도 가능하다고 보았다(《실락원》5편 493∼500). ‘때가 오면 인간의 천사와 같이.........하늘의 낙원에 살게 되리라’는 말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의 순환은 체험 여하에 따라 행복한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불행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즉 시간의 반복을 기계적으로 체험하면 끝없이 따분하고 불행할 테지만 그것은 생명적 리듬으로 체험할 것 같으면 한없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체험적 시간이란 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말과 같다.
낙원의 시간은 춤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음악과 함께 흐른다. 따라서 아담의 시간체험은 즐겁고 상쾌하고 행복하다. 그것은 그 체험이 기계적이 아니고 동력적이고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턴은 낙원의 시간적 추이를 〈즐거운 변화〉(《실락원》 5편 628) 또는 〈상쾌한 변화〉(《실락원》 6편 8)라 했다. 아담과 하와는 부지런히 노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적 리듬과 조화를 이룬 것이기에 즐겁고 유쾌하기만 하다(《실락원》 4편 610∼22).
이런 아담의 시간과 가장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것이 사탄의 시간이다. 아담은 순환되는 시간과 조화된 생활을 했지만, 사탄은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을 위해 자연의 리듬을 깨뜨린다. 이래서 그는 밤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천상에서 그가 반란을 결의한 것은 신이 그 아들을 천상의 주인으로 세운 날이었다. 한밤중에 그는 자고 있는 베엘제불을 깨워 반란의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실락원》 5편 667∼72), 신의 명령에 분격을 참을 수 없어 잠을 이룰 수 없다(《실락원》 5편 673∼6). 그래서 그는 한밤중에 급거 반란군을 북쪽에 집결시킨다(《실락원》 5편 686∼91). 다음 날 그는 신의 군대에 도전했다가 패하지만, 그날 밤 천군은 휴식을 취하나 사탄은 휴식도 없이(《실락원》 6편 415) 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에서 사탄이 대포를 만들자고 제의하자, 그 부하들은 〈즉시 산회해서 그 일로 급거한다〉(《실락원》 6편 507). 결국 사탄은 천상의 싸움에서 패하고, 그 부하들과 함께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지옥으로 떨어져, 불바다에서 의식을 잃는다. 그러나 사탄은 의식을 회복하자, 베엘제불을 불러 신에게 저항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실락원》 1편 178), 자고 있는 부하들을 일깨워 회의를 소집하고, 자기 혼자 낙원에 원정할 것을 승인받은 뒤 곧 낙원을 향해 출발한다. 사탄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혼돈 속으로 전진한다. 우주외각에 도착한 사탄은 우주를 바라보며 잠시 그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끼지만, 〈그 이상은 지체하지 않고〉(《실락원》 3편 561) 다음 행동을 취한다. 사탄은 낙원을 순시하고 있는 천사에게 발각되어 일시 추방되지만, 한밤을 타서 8일째 되던 날 낙원으로 진입한다. 그 이튿날 그는 하와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실락원》 9편 479∼80)고 결심한 후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윽고 타락시키고 만다.
이렇게 사탄은 자신의 계획(미래적 시간)을 위해 쉴 때 쉬지도 않고 밤낮 구별 없이 투쟁하고 행동한다. 어떻게 보면 사탄은 인간보다 더 근면하고 전투적인다. 그것이 악마의 본성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탄의 그런 본성은 한 순간도 현재와 화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현실이 불만스럽다.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추진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니까 그의 현재는 미래의 희생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승리는 거둘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실패를 개탄하여 후회한다. 후회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면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사탄에게는 현재가 없다. 현재와 화해할 수 있는 아담은 일을 해도 행복하고 유쾌했지만 자연의 리듬을 깬, 현재를 갖지 못한 사탄은 불행하고 불만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시간의 흐름을 기계적으로 체험하는 아담과 하와는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다. 동시에 그 시간은 죽음과 연결된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느리고 더디기만 하다(《실락원》 10편 857∼9). 그러나 영원(그리스도)이 시간 속에 들어옴으로써 죽음을 기다리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간의식은 역설적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진리가 있다.
5. 밀턴의 사탄
사탄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상위천사 중 하나였지만, 이기주의적인 교만 때문에 타락해서 악천사들의 두목이 되었다. 비록 하늘로부터 떨어지긴 했지만, 지옥의 불타는 호수에서 몸을 일으켜 호숫가를 향해 걸어가는 사탄은 우선 그 체구가 감탄할 만큼 거대하다. 밀턴은 고전적 전통을 따라 자세한 묘사는 피하고 있지만, 사탄이 지니고 다니는 두 가지 소유물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마왕은 바닷가를 향하여 걸음 옮긴다. 무거운 방패
육중하고, 넓적하고 둥근 하늘의 담금질쇠를
등에 걸머지고. 그 넓은 원주는
어깨에 걸려 달덩이 같고........망원경으로
.........바라본 그 달과 같다.
또한 그는, 어떤 큰 군함의 돛대로 쓰기 위해
.........키 큰 소나무도
이에 비하면 지팡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그런 창을 짚고서 불타는 진흙탕 위를 걷는다.
―《실락원》 1편 283∼95
군함의 돛대가 될 키 큰 소나무도 그것에 비하면 지팡이 정도밖에는 안되어 보이는 그런 창을 짚고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하여 본 달과도 같은 방패를 걸머지고 불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사탄이 가히 어느 정도였던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조금 내려가 보면 지옥에 떨어진 반역천사들 앞에 나타나 명령을 하는 사탄은 마치〈자랑스러운 탑〉(《실락원》 1편 591)과 같다 하였고, 태양이나 달모양과 흡사하다고 했다. 이로써 여전히 타락 이후에도 사탄에게는 본래의 광채와 영광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점차 그 영광은 희미해졌고 안개 낀 아침의 해와 같고 달은 달이지만 컴컴한 월식 때의 달과 같다.
다시 새로 창조한 인간 세계를 탐험해 보기로 결정한 반역천사들의 결의에 따라, 천신만고 지옥문을 통과, 신세계가 보이는 곳까지 항해하고 난 사탄을 마치 〈풍우에 시달린 배〉(《실락원》 2편 1043)와 같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비유들을 통해 어딘가 천상의 광채와 영광 또는 그 당당한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 인물은 대단히 크다는 느낌이다.
지옥을 빠져나와 에덴에 도착한 사탄은 마치 배고픔에 주려 먹이를 찾는 늑대가 담장을 넘어 양 우리에 침범하듯이 또는 도둑이 어느 부자의 돈을 훔치려고 정문을 피해 창문이나 지붕 위로 잠입해 들듯이(《실락원》 4편 172∼91) 담을 넘어 동산 안으로 스며든다. 그후 사탄은 가마우지(탐욕의 새)의 모습으로 나무에 올라 동산을 살피는가 하면 마치 재갈을 깨물며 고삐에 매여 끌려 가는 사나운 말처럼 거닐기도 하고(《실락원》 4편 860∼1), 하와의 꿈을 통해 그녀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웅크리고 있는 흉한 두꺼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뱀을 찾아낸 사탄은 그 짐승의 의식을 사로 잡는다. 그 후 사탄은 얼굴이 오그라져 야위고 팔은 늑골에 달라 붙고 다리는 서로 뒤꼬이고 드디어 엎어진 채 쓰러져 배를 깔고 기는 기구한 뱀으로 변신된다(《실락원》 10편 510∼20). 이리하여 의도한 갈채는 야유로 터져 나왔고 개가는 수치로 변했다.
이러한 비유들을 통하여 볼 때 《실락원》 1편과 2편에서는 거신족이던 사탄이 그 뒤로 가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해지고 만다. 그 흉측한 뱀으로 변한 사탄에게서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하여 보았던 달과 같은 방패와 큰 군함의 돛을 만드는 키 큰 소나무보다도 더 큰 창을 지니고 다니던 거신족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고, 해나 달과 같이 빛나던 그 천상의 영광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러한 사탄의 몰락은 순전히 그의 교만의 탓이라고 생각된다. 하느님께 반역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그로테스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만은 회개하는 마음을 금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타락했으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릴 때 그들의 마음은 옛날과 같이 평정되어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낙원을 떠날 수 있었으나, 사탄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뉘우침이 없다는 것이 사탄의 비극적 본성이다.
《실락원》 1편 156∼68행을 보면 무엇이건 선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요, 언제나 지고한 하느님의 뜻에 거슬려 악을 행하는 것만이 그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섬기느니보다 지옥에서 다스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가져오는 결과는 실로 가공스런 것이었다. 사탄은 온갖 힘을 파괴적 목적에 바쳐서 밤낮을 쉬지 않고 그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복수를 획책하고 질서를 파괴하여 반질서를 꾸며 감에 따라 그 자신도 도덕적으로 더욱더 타락하여 그 몰골은 더욱더 비천해지고 그 마음은 더욱더 약해져 결국 만악을 꾸미게 된다. 최초에는 장엄한 빛도 있고 연민의 정도 다소 있지만 흉측한 뱀으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선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고 낙원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마음 설레이는 것 같은 일말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잔인한 시기와 복수의 불길만이 맹렬히 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사탄은 그 마음속에 지옥을 지니고 다니며 허공의 권세를 잡으려고 갖은 술책과 미혹과 술수를 다할 뿐이다. 이러한 사탄의 극렬한 투쟁은 여자의 후손이 나와 그 머리를 부숴 버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실락원》의 중심문제들을 피상적으로 살펴봤다. 그 결과 얻은 결론은《실락원》의 중심되는 테마는 인류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에 이어지는 질서를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파괴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 죽음을 체험하게 되었고, 따라서 하느님이 최귀한 선물로 준 에덴에서 자연의 리듬과 조화된 생활을 하며 즐겁게 보내던 최대의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일을 꾸미는 악의 장본인은 사탄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의 화신인 메시아가 나타나 종국에는 사탄의 머리를 쳐부수고 잃었던 낙원을 회복할 것이며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한다. 일시적으로 하느님의 길이 불의한 것 같으나 최종적으로는 정당하며 그것을 밀턴은 온 인류에게 증명하고자 한다.
셰익스피어의 뒤를 잇는 영국의 위대한 시인
1. 밀턴의 생애
패터슨의 말대로 밀턴은 예술에 있어서 위대하기 전에 인생에 있어서 위대했다. 그러기에 시인으로서의 밀턴이 남긴 여러 작품들의 예술성에 앞서 인간 밀턴이 어떤 인생 노정을 밟았는가에 더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반적 관심을 다소라도 풀어 보는 뜻에서, 그의 생애를 간추려 소개해 볼까 한다.
밀턴(John Milin, 1608∼1674)은 런던의 성 바울 사원 근처 브레드가에서 1608년 12월 9일에 태어났다. 이무렵 성 바울 사원과 시장 관저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인어의 집(The Mrmaid Tavern)〉이 있었는데, 여기서 셰익스피어, 벤 존슨, 월터 로올리, 보우몬트, 플레쳐와 같은 당시 문단의 기라성 같은 존재들이 미주를 마시며 그들의 기지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 어릴 때 밀턴은 이런 문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밀턴의 할아버지는 옥스퍼드 부근에 살고 있던 로마 카톨릭 신자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후 런던으로 나와 법률 공증인이 되어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문학과 음악에 소양이 높은 교양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본시 웨일즈 출신으로 재덕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이처럼 밀턴의 가문은 종교적이었을 뿐 아니라 음악적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오르간 연주와 노래를 공부했고, 후일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 더구나 그의 시에 음악적 연상이 많은 것으로 보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음악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개인지도를 맡았던 유명한 신학자 토머스 영과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문학적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영향 밑에서 그는 학문과 문학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고, 그 자신의 고백 그대로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자정 전에 자 본 일이 없었다. 주로 이런 지적인 탐욕이 어릴 때부터 그의 시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토머스 영이 대륙으로 떠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세인트포폴 학교로 보냈다(1620). 이곳은 그의 신앙심과 문학적 감각을 더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서 밀턴은 소년 예수를 모방하는 생활을 하며 밤 늦게까지 독서를 하고, 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찰스 1세가 즉위한 후, 즉 1625년 그가 17세 되던 해에 밀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카리지에 입학했다. 그가 켐브리지로 진학한 것은 옥스퍼드가 보수적이고 다분히 왕당파적 색채가 많은 데 비해, 켐브리지는 진보적이고 청교도적인 분위기였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대학 재학시 그의 용모가 단정수려하고 소행이 순박한 탓으로 그에겐 〈크라이스트 대학의 숙녀〉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공부만 하는 착하고 단정한, 기백도 없고 기질은 허약한 그런 학생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지도교사와 의견상의 대립으로 충돌도 했고, 구태의연한 중세기적인 대학제도에 반항하다가 한 학기 동안 정학처분을 받은 일까지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이미 자유투사로서의 밀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중 최초의 것은 16세 때에 〈시편〉 114와 136을 운문시로 옮긴 것이지만 켐브리지 재학 시 그는 영어와 라틴어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 중에서도 1626년 졸업반 때 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 부쳐서(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라는 시가 가장 기억할 만하다. 이 시에는 스펜서나 플레쳐 형제의 영향이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20대 청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그런 기교와 재질이 나타나 있다. 특히 1630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에 대하여(On ShaRepeare)》라는 시가 1632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 전집》 권두에 게재됐다는 것만 봐도 그의 시재가 당시 식자간에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을 성직자로서 종교계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나, 당시의 타락한 교회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으로써 위대한 명성을 남기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결심이 굳어졌기에 그는 켐브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자(1632), 곧 부친이 은퇴하고 있던 호튼으로 와 약 5년 동안 고전을 연구하며 창작에 열중했다. 초기 걸작으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주요한 작품들, 《유쾌한 사람》《침울한 사람》《코머스》 등이 모두 이 무렵에 씌어졌다.
《코머스》 이후 약 3년 동안 자중하고 붓을 들지 않았다. 그때 마침 1637년 8월에 대학 시절의 친우요, 장래가 촉망되던 시인이요, 학자인 에드워드 킹(1612∼37)이 아일랜드 해협에서 익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선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턴은 이에 목가적인 애가 〈리시더스(Lycidas)〉를 썼다. 밀턴은 친구의 죽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고 인생의 허무를 체험했던 것이다.
호튼에서 비교적 한가한 생활을 끝마치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것은 1638년 4월이었다. 밀턴은 이 여행에서 만소와 실명한 노천문학자 갈릴레오를 만났다. 거기에서 다시 그리스 여행을 떠나려 했을 때 국내에서 제1차 감독전쟁인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밀턴은 그리스 여행을 중단하고, 외유 1년 3개월만인 1639년 7월말 경에 귀국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내란은 평정되어, 그는 런던에 사숙을 열고 조카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1640년에 제2차 감독전쟁이 터져 결국 영국군은 대스코틀랜드전 에서 대패했다. 장기 의회가 소집되고, 그의 옛 은사였던 토머스 영이 국교회와 싸우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밀턴은 귀국한 지 2년만에 논단에서 자유를 절규, 논쟁과 정쟁의 와중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그는 종교적 자유, 가정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제창하는 수편의 산문을 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주창한 글 《아레오파기티카》이다.
1645년 6월 이후 전세는 급전하여 왕당파가 패배하니, 잔존 의회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찰스 1세를 폭군·살인자·국가의 적이라는 명목 아래 사형했다. 드디어 영국은 공화국임을 선포하게 되었고, 1660년의 왕정복고까지 11년간 영국을 지배하게 된다. 왕이 처형되고 공화 정부가 수립되자, 밀턴은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주로 외교문서의 번역과 대외적 선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격무로 해서 결국 그는 그나마도 불완전했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와 같이 밀턴은 약20년간을 정치를 위하여 그 아까운 시재를 낭비했다. 그러나 그의 20여 년간의 정치적 체험은 후기의 대작을 쓰는 데 있어서 유익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메리가 죽은 후 홀몸으로 있던 밀턴은 1656년 11월에 캐더린 우드콕과 재혼했으나, 불행하게도 그는 1년만에 죽었다.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크롬웰이 1657년 9월에 병사하게 되자, 청교도혁명도 종말을 고하고, 드디어는 찰스 2세가 런던으로 돌아와 왕정이 복구되었다.
왕정복고 후 밀턴의 이름이 사형수나 그 밖의 처형을 받을 사람들의 명단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공화정부의 대변인역을 맡아본 그의 활약상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기이하게 생각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라틴어 비서의 조수였던 앤드루 마블과 찰스 2세의 총신이요 사가였던 에드워드 하이드 등 몇 사람의 주선과 구명운동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주변에는 딸 셋과 생질인 에드워드 필립스, 그리고 몇 친구들만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밀턴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동정하여 그의 친구였던 패지트 박사는 자기 친척의 딸을 소개해 주며 그에게 결혼을 권유했다. 상대는 엘리자베드 민셜로 당시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30세나 연상인 눈먼 남편을 충실히 받들었으며, 밀턴의 이 세 번째 결혼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만년에 통풍으로 고생하다 1674년 11월 8일에 자기 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볼 때, 비교적 한가한 호튼 생활을 빼놓고는, 그의 생애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가장 쓰라린 시련의 경험은 세 방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가정의 문제요, 그 둘째는 정치의 문제요, 그 셋째는 육체의 문제였다.
인생의 삶에 있어서 결혼은 최대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최대의 암초가 될 수 있다. 밀턴은 한마디로 말해서 결혼생활의 실패자였다. 한 번도 어려운 결혼을 세 번씩이나 하였고, 말년에는 딸들의 학대까지 받았으니, 그에게 있어서 가정은 실로 시련의 광장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약 20여 년의 정치생활에 온갖 정열을 다 쏟았지만, 1660년 5월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자유 공화국의 꿈은 깨지고 말았고, 사형은 면했다고 하나 크롬웰 밑에서 일해온 그였으니 영어의 생활만은 면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와 같이 가정적으로 실패했고 정치계에서도 쫓겨났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는 육체뿐이었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은 그것으로 발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밀턴의 시력은 약한 편이었지만 과도한 독서와 지나친 과로로 그는 44세(1652)라는 나이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또한 고질병인 통풍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이러한 실명과 통풍은 그에게 있어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은혜의 신까지도 의심하고 욥처럼 항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이런 정말과 고독의 심연에서 새로운 영적인 빛을 보게 되었고, 신앙생활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분연히 일어나 대오의 길로 나섰으며, 그 결과 《실락원》《복락원》《투사 삼손》같은 불후의 거작들을 남겨 놓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후기의 작품들 속에는 20여 년간의 피어린 투쟁과 쓰라린 경험, 말하자면 그의 인생 자체가 투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성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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