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옛날, 우리나라 선비들의 독서하는 모습은 자못 근엄한 바 있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마치 성현 앞에 선 생도처럼 책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장 한장 정성스럽게 읽어나갔다.  

선비들의 서재에는  묵향이 그윽한 속에 책들이 그득 쌓여 있고, 거기서 글을 읽는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마당쇠도  쓸던 비를 잠시 멈추고 주인에 대한 외경감을 품은 채 마치 별세계의 소리라도 듣는 듯이 귀를 귀울  였다.   이와 같이 한 때는 책을 읽는다는 일이 그 사회를 이끄는 상류계층의 전유물이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독서계급'하면 적어도 그 사회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선도하는 집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이 집단은 독서를 통해 선철의 도를 익히고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닦았으며 고급문화를 창도하는 소위엘리트로서의 구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제도가 생기면서 서부터는 높은 지위를 확보하는 필수적인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독서야말로 이들 특권층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엄숙한 행위요,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의 자취가 일부 남아서 아직도 독서는 고상한 것이고 정신적 여유를 즐길 만한 배부른 사람들의 고급스런 행위이며 때로는 문화적,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주요 수단이라는 이미지로 흔히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민권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독서의 개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오늘날, 신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대전제 아래 이루어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라의주권이 소수에 의해 독점될 수 없듯이, 문화유산과 지식 및 정보 역시 일부 계층에 의해 독점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식과 정보의 가장 중요한 매체인 책을 읽는 일은 이미 일부계층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책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더불어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사회 구성원간에 책을 통한 정보의 공유와 원활한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는 저간의 사정이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독서의 개념은 인쇄술의 발달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곧 전자에서는 독서란 선철의 도를 배우고 문화를 전수받는 엄숙한 행위요, 특권층에 한정하여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도야하는 주요 교육 수단이었던 데 비하여, 후자에서는 점차 복잡다기화해가는 커뮤니케이션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간의 사회적 통합을 위한 필수적인 방편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대표적인 정보수용 행위의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이 독서 개념은 인지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독서행위의 주체인 독자의 측면을 중시하면서 독자의 능동적인 사고과정이란 의미를 덧붙이게 되었다.

곧 독서란 문자에서 의미를 도출해내는 해독과정이나 단순한 의미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분석, 종합, 추론, 판단하는 주체적인  사고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사고활동을 통하여 독자는 글의 행간을 읽을 수 있고  필자의 의도와 목적을 찾아내어 나름대로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독서는 음성언어를 포함한 일반 커뮤니케이션과 가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독서행위가 본래 비구두적 표현인 어조, 몸짓 등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 송신자와 수신  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피드백(feed back)이 어렵다는 점 등이 그 제약점이라면, 반면에 상황의 제약을 덜 받는다는 점, 글내용을 계속 재확인함으로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즉흥성과 그에 따른 주관적 오해의 소지를 극복하고 어느정도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특징은 독서의 장점으로 들만 하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론은 독서에 대한 우리의 한정된 고정관념을 바꾸어주고, 글의 행간에 엿보이는 필자의 입김과 이에 반응하는 독자 측면, 그리고 이 둘을 잇는 글의 매체로서의 특징과 이들을 둘러싼 상황성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주는 면이 있다.

결국 독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전통의 깊이만큼 풍부한 개념을지니게 마련이다. 그것은 전대의 문화를 이어받는 전통적인 고급문화 행위요, 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위한 사회적 통합의 필수수단으로서의 정보 수행 행위이며, 글을 독자나름으로 의미화하는 고도의 지적행위인 동시에, 일정한 상황하에 전개되는 필자와 독자간 의 의도된 대화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독서개념은 사회에서 문자매체가 차지하는 역할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양성을 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