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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읽는 만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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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곰치 (소설가)
보름에 걸쳐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완독했다. "<전쟁과 평화>는 완독했다는 것 자체가 자랑이 된단다." 고교 시절 독서광인 한 친구가 하던 말이 새삼 기억난다. 사실 나는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이었다.
돌로호프가 창문 바깥에서 아무것도 잡지 않고 럼주 한 병을 다 마시는 장면까지 읽은 게 고교 때의 일이다. 백 쪽 읽는 데도 그 지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학 4년 때 무려 8개월에 걸쳐 집적대면서 반 정도 읽고 포기한 게 두 번째다. 여전히 지루했고 번역 문장이 난삽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이번은 여러 모로 달랐다. `감동'은 누선이 작동하는 것, `감명'이라고 할 어떤 환한 빛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 이 두 가지가 있겠는데, 그게 겹쳐서 오는 것이다. 군대 가는 안드레이가 아버지와 작별할 때, 페차의 전사 통지를 받고 백작부인이 울부짖을 때, 안드레이가 사망할 때, 야윈 나타샤를 피에르가 한참 알아보지 못할 때, 마리야가 니콜라이에게 제 사랑을 주장할 때 등등.
책의 가치는 독자의 주체적인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그저 지루했던 것이 몇 년 세상을 굴러다니며 나도 여러 가지 마음의 체험을 몸 안에 저축하게 되었고 백작의 언어가 그것들을 건드려준 것이다. 백 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에 감동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목하 러시아에서 자행되는 체첸 전쟁의 수천 전사자 소식엔 `민족 수준의 저 후진국들…' 하며 냉소적이 될 뿐이다. 체첸에서 수만이 죽는다 해도 그건 정보 수준이다. 그러나 안드레이의 죽음엔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학은 앎의 영역이나 `사실'의 인식 차원이 아닌, 기본적으로 마음의 능력과 함께 가는 진실에의 전면적 응전임을 깨닫는다. 백년 이상의 시간의 벽을 뚫고 확인할 수 있었던, 대가의 손에 의해 굳혀진 진실의 그 엄연한 존재는 정보 속도전에 밀쳐지는 나를 당당하게 한다.
서울의 한 친구는 최근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고 전화로 자랑했다. ꡒ긋는 족족 밑줄이야.ꡓ 직장 일에 바쁘지만 녀석은 새로 플라톤 철학서를 잡고 있다는데, 아주 고전 중이란다.
시절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된 책을 찾게 하는가. 책장을 뒤져보면 읽다가 포기한 케케묵은 보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고전과 함께 시간의 허무를 이길 뿐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확인해보는 것은 좋은 겨울나기다.
[ 한겨레신문 ‘책의 발견’ 신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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