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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청] 잠시 멈춤, 느리게, 늘임표, 쉬어가기, 『페르마타, 이탈리아』 by 이금이
글쓴이 최현영


'페르나타'는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음표나 쉼표에 늘임표 기호가 있으면 본래 박자보다 두세 배 길게 늘여 연주해야 한다. 페르마타라는 단어에 여행의 본질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평소엔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것들을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실은 평소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들이다. (143쪽)

『유진과 유진』, 『알로하, 나의 엄마들』, 『너도 하늘말나리야』 등으로 유명한 이금이 아동문학 작가님이 예순이 되기 전에 오랜 친구와 함께 떠난 한 달 남짓의 이탈리아 여행길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여행 에세이다.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 수많은 사람이 폐색감을 느끼고 갑갑증에 시달릴 현재 시점에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두 분은 세 가지 수칙도 세우셨다.

한 도시에 이틀 이상 머물기

더 많이 보려고 욕심내지 않기

계획에 대한 강박 버리기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도시들 밀리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도 포함되어 있고 꽤 낯선 지명들도 있다. 알베로벨로, 마테라, 타오르미나, 라구사, 시라쿠사, 스펠로 등은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지명들이다.

갔던 곳을 또 여행하노라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처음 읽을 때는 글쓴이의 의도를 따라가기에 급급하지만 두 번 세 번 읽다보면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도 보이고 나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할 여력이 생긴다. (30쪽)

어쩌면 이렇게 멋진 비유를 하셨는지 역시 작가님답다. 설레는 맘으로 첫 번째로 읽은 후 시차를 두고 두 번, 세 번 읽다보며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책처럼 여행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유럽 등은 거리, 비용 등의 면에서 자주 갈 수 없으니 꽉꽉 채워서 본전 뽑는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더 부담스러워서 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작가님도 친구분과 위의 세 가지 수칙을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변경하여 축소할 때는 꽤 아까워 하셨던 모습에 공감이 갔다.

내게 손에 익은 정다운 책 같은 곳은 아마도 일본 도쿄 근교의 가마쿠라가 아닐까 싶다. 지인분이 살고 계셔서 댁에 가서 지내기도 했고 함께 걸어다니기도 했고, 차를 렌트해서 하코네, 이즈 근교까지 여러 차례 다녀오기도 했었다. 책에서 유독 좋아하는 부분을 펴서 읽고 또 읽으며 곱씹듯이 찾게 되는 곳인 것 같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옆 사람과 맞닿은 어깨에서, 그와 함께 나누는 온기에서 나오는 거니까. 진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나온 내 삶이 그랬던 것처럼. (36쪽)

동반자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여행길의 동반자, 인생길의 동반자가 있기에 조금은 인생도 여행도 쉽고 즐거워지는 것 같다. 혼자였다면 트라우마로 남을 일도 좋은 동반자와 함께라면 무용담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작가님도 어둑어둑해진 낯선 거리, 좁은 골목길에서 공포를 느꼈을 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친구분의 온기 속에서 두려움을 이길 힘을 얻으셨다고 고백하신다.

그러나, 긴 여행으로 지치고, 친구분의 눈 상태도 완전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고 잠깐씩 만나고 단기간 여행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성향의 차이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셨다는 솔직한 고백에 정감이 느껴지고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물론 계속 얼굴 맞대어야 하는 동반자와 갈등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당시에는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해하고 더 관계가 깊어지고 다음 여행에서는 좀 더 서로에게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다음 여행을 위한 수칙을 세우셨다고 한다.

짐 가볍게 싸기

현지 음식 도전하기

따로 또 같이 지내기

세세한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규칙을 세워야 마음이 편한 모습이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작가님과 무척 비슷한 성향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수칙'을 세우는 것부터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낸 후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 익숙한 음식을 계속 먹는 것 등 호기심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부분이 비슷해서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용기도 생기기도 했다.

사씨는 도시개발로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서울의 산동네와 비슷했다. 허물어져가는 담벼락이, 바스러진 나무문이, 녹슨 창살이, 간신히 버티고 선 기둥이 고된 삶을 견디던 사람들의 주름진 얼굴, 거친 손마디 같았다. 그 어떤 크고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보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 와서 나는 예쁜 장면만 고르고 잘라 찍고 있었던 거다.

동화 속 아이가 모두 착하고 순수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다우면 된다. 알베로벨로와 사씨가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충분한 것처럼. (86쪽)

참으로 아동문학 작가다우신 통찰력과 지혜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 열심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엽서의 사진에는 동화 속의 예쁘고 작은 유럽 마을 같은 곳들이 많이 있었다. 소품처럼 등장하는 걸어놓은 화분, 베란다 화분, 그리고 자전거까지. 그래서 그런 예쁜 모습만을 사진기에 담고 계시다가 문득 각 지역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신 것 같다.

이제 예순 살이 되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용기 내어 그때 여행 잘 다녀왔다고 동반자이신 진 님과 이야기 나눈다고 하셨다. 나도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코로나 시작되기 전에 정말 잘 다녀오셨네!" 이러면서 내 일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삽화도 좋긴 하지만 작가님께서 사진기에 담아오셨을 많은 사진들이 너무 보고 싶다. 나도 남편이랑 가도 좋고 예전 회사 동생으로 내 여행 파트너와 함께여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달까지는 아니어도 일주일~보름 정도씩 한두 곳에서 '주민'처럼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항공, 숙소, 교통편 예약, 동선 짜기 등 예전과 달리 귀찮은 마음이 먼저 들지만 진짜 간다고 생각하면 다시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여행이 작가님의 인생 후반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줄지 엄청 기대된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