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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닳지 않는 초대장, “놀이의 쓸모”를 읽고
작성자 홍은수 작성일 2023-07-30
작성일 2023-07-30

도서명: 놀이의 쓸모 / 최미향 나비타놀이교육연구소 지음 / 출판사: 나비타


닳지 않는 초대장, “놀이의 쓸모”를 읽고


웰빙(well-being)의 핵심은균형이다. 그리고 웰빙의 본질은 태어나는 순간, 유아기의 놀이를 통하여 물 흐르듯 흡수되어야 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균형의 가치를 보다 더 깊이 갈구해 왔다. 아마도 경제적인 안정을 언제나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고, 노동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부품처럼 소비되는 동안 방치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돌아보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조화가 무너진 삶 혹은 사회는 어떠한 측면으로 봐도 건강할 수 없기에 반드시 크고 작은 문제를 낳는다. 우리 사회는 모든 초점을 경제 성장에만 맞추던 격변기를 지나 현재는 어디 즈음에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균형감의 상실을 위험으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내적으로 성숙해졌는데, 이는 최근에 사회가 지향하는 주요한 테마가 인권의 구현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화를 가치의 중심에 두게 되면, 고립되고 결핍된 부분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보호는 약자의 외면 받던 권리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부터 그 여정이 시작되는데, 어린이의 인권은 자유롭게 놀 수 있을 때 가장 온전하게 보호받는다. 아동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건축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는데 아이들에게 결핍된 가장 큰 부분이 놀이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읽어내기에 변화된 건축의 모습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이 달라지면 시선은 정교해지며, 그것이 공간에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시멘트 바닥이 깔리고 복도는 일자형의 트랙을 가진 기존의 형태가 아니라 숲속의 집을 콘셉트로 하여 사용자인 아이들 중심으로 리모델링 하였는데, 칠판 또한 복도 쪽에 배치하여 아이들이 교실의 앞, 뒤 공간 전부를 제약 없이 누비며 뛰어놀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어떤 중학교는집 같은 학교를 지어 마치 타운 하우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파트촌에서 자라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아파트와 다른 구조를 보면서 옛날의 향수를 간접적으로 느끼기를 원했던 건축가의 바람이 담겼다. 중정이 매우 여러 개인 학교도 지어졌는데, 아이들이 내부 어디에서든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로 인해 학업이 최우선이라는 명제하에 당연하듯 행해진 통제 중심의 교육으로부터 쉴 수 있고 놀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존중의 태도를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전한다. 이 아이들은 분명히 색다른 공간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에서 뛰어놀면서 권리를 존중받고, 배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는 점이다.

삶의 그림이 한결 풍부해지고, 인권을 존중받는다는 것은 개성과 고유함을 가꾸고 지켜갈 수 있는 환경과 힘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책은 놀이를 통하여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직접적이고도 뜨겁게 다룬다. 사람은 전부 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고 누구나 약자였다. 놀이는 결국 한 사람의 고유함과 인권을 묻는 문제이다. 놀이 그 자체를 통로 삼아 아이들이 열어가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원형을 만난다. 아이들은 끊임없는 기다림을 허용 받아야 하는 존재들인데, 아이들이 마음껏 놀도록 하는 건 어른으로서기다려 주는 방식이 아닐까.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감지할수록, 쓸모라는 다소 이해타산적인 어감의 단어만으로 놀이의 가치를 함축하기엔 놀이의 영향이 한계 없이 광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는 어떤 소망에 줄을 긋고 집중할 것인지와 관련한 행위이며, 인생의 독자성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 주는 외로움을 다루어내면서도 오히려 충실하게 그에 맞서 홀로 설 수 있는 뿌리의 견고함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평생 동안 화려한 성과, 버젓한 결과는 무조건 인내의 산물이므로 즐거움을 포기해가면서 애를 쓰고 어려움을 견디는 사람만이 그 달콤함을 만끽할 자격이 있으며, 옳게 사는 것이라고 주입받았다. 우리가 정의하는 바른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반면 놀이는 그런 인식에 반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연상되므로 한편으로는쓸모라는 단어의 선택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즉각적인 환기를 일으키는 이 단어를 통해서라도 돌아볼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지나친 그 의미를 발견하고 재정의 하도록 이끄는 듯해서였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든지 놀이를 만들어낸다. 갯벌과 모래사장만큼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는 없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제각각으로 신나게 자신만의 세상에 끊임없이 색을 입힌다. 창조성은 본능이며, 놀이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광경이자, 강렬하게 자극되는 수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몇 년 전부터 세계의 다양한 문화재를 소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전 전시품 중에는사자 벽돌 패널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가장 흔한 재료인 점토는 벽돌의 주재료가 되었고, 벽돌들을 쌓아 웅장한 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냉철한 이성적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을 탐색하고 즐기는 창조적인 본능이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내딛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동기부여가 놀이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어디까지 대체할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우리는 편리와 존재의 불안 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소통을 원하는 마음은 연령을 떠나 여전히 인간의 식을 수 없는 본능이다. 조직 역시감성리더의 자질을 중시한다. 서울에는 발달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는데, 휠체어를 탄 아이를 배려하여 화단의 높이를 높게 만들었다. 이는 배려와 감성이 선행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세심함일 것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기분이 감정이라면, 자신과 타자 사이에서 타자의 마음에까지 관심을 뻗칠 수 있는 감각이 감성이다. 전인적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안정감 있게 균형을 이루는 사람인데, 이런 감성의 싹은 놀이를 통해 양보와 조율을 배우고 역할 놀이로 타인의 입장과 눈높이에 스스로를 맞춰보면서 가장 잘 틔울 수 있다.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언의 감정을 공유한다. 친구와 같이 걷던 길이나 숨바꼭질을 하던 일을 떠올리면, 나만의 기억과 언어로 눈앞에 없는 상대를 호명할 수 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당장 보이지 않아도 떠올리는 힘, 그것이 사랑이다. 놀이는 나를 발견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아이가 놀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놀이는 자존감, 독립심, 자율성, 창의성 등 살아가는 데 기둥이 되는 모든 영역을 조화롭게 발달시킨다. 균형 잡힌 삶, 균형 잡힌 사회는 놀이로부터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 잘 놀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다움 안에 타인다움을 포용하고 기꺼이 담아내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가면 놀 거리가 마땅치 않아 친언니와 둘이서 색종이를 가지고 종이컵에 눈, , 입을 붙여 인형 놀이를 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항상 준비해 놓으시던 색종이의 그 감촉도 내 손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의 아무런 지시도 없이 언니와 함께 그저 우리들만의 인형을 만들어 애정을 쏟고 애지중지하던 기억은 그 순간만의 감정과 함께 나를 구성하는 한 조각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놀이가 주는 가장 큰 힘은 부족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이컵과 색종이만으로 저녁 시간이 되는 줄도 모르고 놀던 과정 속에서는 그 시간에 하염없이 젖어들던 기분만이 남아 있다. 평생 무엇인가를 채우는 데 급급하고, 그것을 위해서 달려가고, 아쉬워하는 데 익숙하지만, 놀이는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음을 가르친다. 외부의 조건이 어떻든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실감할 때,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릴지라도 무기력한 스스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마주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놀고자 하는 마음은 천성이고, 이것이 아낌없이 잘 표출될 때 비로소 과정 속에 충실한 삶이 가능하다. 놀이는 나를 마주하고, 상대를 마주하는 초대의 시간이다. 초대에 성심껏 응하는 부모님의 반응에 아이들은 평생의 자신 편이 있다고 느낀다. 하는 이와 받는 이 모두가 설레는 말, 놀이는초대를 닮았다. 뜻깊은 시간에 소중한 누군가를 초대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상대를 부를 수 있는 사람, 아이들이 그런 어른이 된다면 공존과 조화는 고유한 음성이 되어 우리 곁의 더 많은 것들을 깨우고 초대하지 않을까. 사라지지 않고 닳지 않는 초대장이 되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