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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슬픈 열대

지은이
레비스트로스
출판사
한길사
페이지수
762
대상
현대 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프랑스 레비 스트로스의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작으로서, 철학으로부터 인류학으로 이행한 저자의 지적 여정이 기술되고 있다. 브라질 인디언들의 풍속연구를 직접적 제재로 다루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현대 문명의 제반 문제를 의미 깊게 시사하고 있다. 미디어 서평 문화는 서로 다를뿐… 우열은 없다 월드컵을 앞두고 전 세계가 축구의 열기로 들끓고 있다. 그런데 만약 양 팀의 승부가 같아질 때까지 계속되는 축구 경기가 있다면, 그래서 이긴 팀도 진 팀도 없게 된다면, 그래도 사람들은 축구에 관심을 가질까? 뉴기니에 사는 가후쿠-가마족의 축구 경기가 바로 그렇다. 우연한 기회에 축구를 배우게 된 그들은 양 팀의 승부가 똑같아질 때까지 며칠이고 계속해서 시합을 한다. 그들은 서양의 ‘축구’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서구인들은 그들이 축구의 규칙조차 알지 못하는 ‘미개인’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승패에만 몰두하는 서구와 그것을 경쟁이 아닌 축제로 바꿔버린 원주민들 중 어느 편이 현명한 것일까? 한 문화의 체계는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을 지니기 마련이며, 따라서 모든 문화적 대상들은, 설령 그것이 의상이나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문화적 배치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가후쿠-가마족의 경우처럼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문명’의 유일한 기준으로 내세움으로써 그것을 척도화한다. 오랫동안 ‘문명=서구적인 것’이라는 공식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문명/야만(미개)’이라는 우열 관계를 형성시켜 왔으며,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비서구적인 것을 서구화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자신도 그 흐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월드컵과 올림픽, 심지어는 아시안 게임까지도 온통 서양의 게임이지 않은가.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서구인들의 ‘척도’가 어떻게 비서구 사회의 삶과 문화를 파괴해 왔는가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여행기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책에서 인류학자인 그는 자신이 1937년부터 약 1년 간에 걸쳐 브라질 내륙지방을 탐험하면서 만난 네 원주민 부족들(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의 삶과 문화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미개’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원주민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서구인들의 폭력 때문에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그는 서구에 의해 파괴된 열대의 삶 앞에서 무한한 ‘슬픔’을 느꼈으며, 그 파괴의 주범이 자신이 속한 세계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열대’라는 타자를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이 속한 서구의 ‘야만적인’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책의 첫 문장인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라는 구절이 단지 취향의 표시에 머물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척도’가 비서구 사회에 적용되는 방식은 매우 끔찍했다. 원주민들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와 선교사들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미생물’로 가득 찬 동물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일하는 짐승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삶과 문화 전체를 파괴해야만 했다. 보로로족의 예를 보자. 그들은 원형의 거주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원형이란 단순한 주거형태가 아니라 우주적 질서의 상징이었으며, 나아가 사회와 종교체계 전체의 근간이었다. 서구인들은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이 원형의 주거형태를 파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마침내 그들의 주거형태를 평행으로 열을 이루는 직선 형태로 모두 바꿔버렸다. 이 변화로 인해 그들은 방향감각을, 그리고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 물론 이 파괴는 문명화라는 명목 하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과연 동양인인가? 우리 또한 서구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근대화’를 민족적 운명을 건과업으로 알고 추진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는 물론 가치관마저 모두 서구화되었다. 국제 대회들이 개최될 때면 식전행사처럼 반복되는 ‘개고기 논쟁’, 그 이면에도 서구의 문화적 가치만이 문명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발상이 숨어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점차 ‘개고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커지고 있다. 그 목소리 속에서 우리에게 내면화된 서구적 가치들의 흔적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서구인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 02/05/07 고봉준 문학평론가> 미개 부족을 퉁해 본 인간과 사회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두껍고 재미있고 한없이 슬픈 책이다. ‘나는 여행과 탐험가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이제 나의 여행담을 얘기하려고 한다’고 시작되는 첫머리에서 ‘세계는 인간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없이 끝날 것이다’라는 가슴 철렁한 지문을 담고있는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독자를 압도한다. 꼼꼼한 관찰과 정치하고 대담한 사고가 시종 시적인 산문속에서 전개되는데 한결같이 참신하고 도발적이다. 1955년 발간된 이 책은 분명 20세기가 생산한 가장 뛰어난 고전의 하나이다. 언뜻 보아 탐색 여행이 끝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처럼 보이지만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의 층위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우선 구조주의 사상가의 지적인 자서전이면서 한 인류학자의 상세한 현장연구의 책으로 읽힌다. 1938년 브라질 내륙의 원주민 사회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조사한 네 원주민 부족에 관한 민족지가 중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가령 연구대상이었던 부족에게 작별을 고할 때 부족의 연장자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그와의 작별이 슬퍼 우는 것이 아니라 살만한 가치가 있는 지상의 유일한 장소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그가 측은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러한 원시적 무구와 행복을 정감있게 그려 보이는 이 책은 일급의 문학책이면서 과학적 탐구의 엄격성과 냉철함을 아우르고 있다. 소멸이 선고된 미개 부족에 대한 기다란 만가(輓歌)로도 들리는 이 책에서 가령 남비콰라족에 대한 몇몇 관찰과 성찰을 살펴보면 책의 특징이 스스로 드러난다. 남비콰라족은 ‘예쁘다’와 ‘젊다’는 뜻을 한 단어로서 표현하고 ‘추하다’와 ‘늙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보고하고 나서 저자는 그들의 심미적 판단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가치, 특히 성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적인 것이 에로스 충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프로이트 이전에도 간파되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프로이트에 와서 더욱 견고한 보증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지질학,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을 왕년의 ‘세 애인’이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저자는 또 글자를 알지 못하면서 글씨 쓰는 흉내를 내는 어떤 추장의 사례를 보여주며 일종의 기억 형태로서의 문자의 성질과 기능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하여 문자가 인간의 지식을 공고하게 하기 보다는 영속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문자와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실감나는 보고이다. 남비콰라 족장의 자기 정의도 흥미롭다. 족장은 전쟁을 할 때 선두에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저자가 만난 족장은 말한다. 그들 사이에서 정치적 권력은 세습적인 것이 아니다. 소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 족장이 후계자를 임명한다. 그렇다고 자의적으로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을 살펴본 뒤에 부족민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사람을 지명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위세와 신뢰감이 그 사회에서 권력의 기반이 되는데 부족민의 동의가 족장의 지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족장이 소임을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관대함이다. 족장에게 준 선물이 며칠 후에는 부족민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족장은 위험부담이 큰 어려운 일을 도맡아하고 사실상 희생적 봉사의 생활을 한다. 그 대신에 그가 누리는 특권은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직책의 부담에 대한 정신적이며 감정적인 위로인 동시에 중임을 맡기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권력의 심리적 기초가 동의이며 일상생활에서 그것은 족장과 부족민 사이의 급부와 반대급부의 작용에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루소가 말하는 ‘계약’과 ‘동의’가 사회생활에서 기본 질료이며 그것 없는 정치조직의 형태를 상상할 수 없다고 피력한다. 참으로 단순하여 개개 인간만을 발견하였다는 남비콰라족 사회를 관찰하면서 저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우수어린 통찰을 보여준다. 관점에 선행해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소쉬르 언어학의 한 명제를 구현하고 있는 실례이다. 논쟁적 저서 ‘야생적 사고’의 원자재인 이 책은 레비 스트로스의 전문서가 공유하고 있는 어려움에서 자유롭다는 것도 특징이다. <동아일보 책의향기 01/7/14 유종호 (문학평론가ㆍ연세대 교수)> 서양인들의 `문명 오만` 비판 열대는 왜 슬픈가.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레비 스트로스(90)는 1937∼38년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네 부족에 관한 현지 조사를 벌이다, 서양 문명이 황폐화 시킨 광활한 열대를 바라보며 비애감에 젖는다. 최근 한글 완역본이 나온 <슬픈 열대>(박옥줄 옮김, 한길사 펴냄)는 이 때의 조사 활동을 기초로 그가 55년에 저술한 인류학의 고전이다. 그가 비애감을 느낀 것은, 먼저 서양의 선교사*대농장 지주*식민주의자*정부 관리들이 나름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고 있던 열대 원주민 사회에 침투해 들어와 이들의 정신 세계를 상업주의로 황폐화 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서양인들이 `문명인` 임을 자처하며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녀온 이들을 멋대로 `야만`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 낙인찍는 오만에 대해 비애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 이른바 `미개사회`은 '인간성에 관한 전체적 체험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우리들의 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이다. 서유럽이 기술적으로는 원주민의 미개사회보다 나을지 모르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어떤 우열도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나무뿌리나 거미 또는 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자신의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만족스럽게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고 말한다. 원시인의 `흉포함`의 징표처럼 여겨온 `식인 풍습` 조차 레비 스트로스는 '조상의 몸의 일부나 적의 주검의 살점을 먹음으로써 죽은 자의 덕을 얻으려 하거나 그 힘들을 중화 시키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변론한다. 그는 '식인 풍습이 죽음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해부학 실습을 허용하는 일도 같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시각은, 초기 인류학자들이 미개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유럽 문명의 `영광`을 드러내려한 태도와 정반대 되는 태도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이 아직 질그릇이나 옷감 짜는 법을 배우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하는 대목에서는, 직선적 문명 발전관에서 완전히 달각하지 못한 그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매끄러운 번역이 방대한 저작 읽기를 수월하게 만든다. <한겨레신문 98/7/7 이상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