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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로빈슨크루소

지은이
다니엘 디포
출판사
청목사
페이지수
318
대상
미디어 서평 누구나 아는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사의 효시적인 작품, 게다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크루소 혼자서 바다로 진출한 것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개인주의, 그리고 무인도에서 혼자서 노동을 한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청교도주의를 구현한 것이라고 하는 분석이다. 그러나 필자가 기억하는 그것은 크루소에 의해 목숨을 구한 불쌍한 흑인노예가 크루소의 다리 밑에 꿇어 앉아 영원히 그의 노예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을 통해서이다. 그 삽화를 필자는 그동안 수없이 보았고, 최근에도 ‘세계의 몇 나라에서만 소개된’ 완결편으로 선전된 책에서 다시 보았으나, 그 ‘완결편’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다. 노예를 구해준 그 날이 금요일이어서 노예는 ‘프라이데이’로 명명되고, ‘주인’으로 섬긴 크루소한테서 영어와 기독교를 배워 함께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그 소설은 전형적인 대영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정당화이다. 당시의 영국인 내지 서양인에게는 크루소가 표류한 섬이 아프리카이든 아시아이든 마찬가지였으리라. 곧 제주도나 독도여도 같은 얘기가 쓰였으리라. 우리의 선조가 그렇게 노예 맹세를 하고 ‘금요일’로 창씨 개명을 당한 얘기였다면 우리는 그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을 것인가? 어디 <로빈슨 크루소>뿐인가? 동화로 소설로 영화로 텔레비젼으로 수없이 본 <타잔>은 어떤가? 인디언 영화는 또 어떤가? 최근 다시 상영된 <정글 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흔히들 명화라고 하는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는 암흑의 중국에서 영국인 가정교사만을 의지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세계를 멸망하게 하려는 동양인 악당을 쳐부수는 007은 누구인가? ‘암흑’대륙의 대탐험가라는 중학교의 교과서부터 소개된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우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숲속의 성자라는 슈바이처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이런 보기는 그야말로 수없이 들 수 있다. 오오츠카(大塚久雄)라고 하는, 일본을 대표한다는 경제사학자는 <사회과학에 있어 인간>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으로 로빈슨적 인간형을 제시했다. 로빈슨이 난파선에서 금화를 발견하나 절해 고도에서 불필요한 그 금화를 버리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 곧 경영’을 중시했다는 점을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로빈슨 크루소>를 제대로 읽지 않은 탓에 생긴 오해였다. 로빈슨은 사실 금화를 가져 가기로 하고 그것을 숨겼다. 따라서 로빈슨은 ‘합리적인 경영적 사고와 행동의 양식’을 갖는 중산적 생산자층의 전형이 아니다. 그는 귀국하면서 숨겼던 돈을 가지고 갔고, 귀국해서도 황금 환상이라고 할 정도로 돈에 매달려 식민지 경영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그 소설은 18세기 영국이라고 하는 중상주의 제국이 낳은 일종의 황금 환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크루소는 서아프리카 기니아의 흑인 노예 밀무역 상인이고, 사탕과 연초 플랜테이션의 경영자이며, 동남 아시아로부터 중국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모험적인 무역상이었다. 그야말로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로, 생산과 무역을 통한 지배망을 형성하는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한겨레신문 02/07/20 박홍규(영남대 교수, 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