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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적과 흙

지은이
스탕달
출판사
범우사
페이지수
569
대상
적과 흑은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줄리앙 소렐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여인들과 사랑하다가 끝내는 사형에 처해진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작품속에는 그 시대의 정치ㆍ경제 ㆍ사회적 현실이 직접적인 제재로 취급되고 있으며, 작중 인물들의 심리적 현상도 모두 시대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 <적과흑>이라는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야심만만한 꿈과 현실적인 환멸과 굴욕속에서 고민하는 또 하나의 '줄리앙 소렐'의 모습을 바로 내곁에서, 아니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에 놀라게 될 것이다. 미디어 서평 프랑스 연애심리 소설의 최고봉,낭만주의 극성기에 사실주의 문학의 문을 연 선구적 작품,풍속묘사에 충실한 1830년대의 연대기,신분의 벽을 넘어 사회와 대적한 한 개인의 모험을 다룬 교양소설… '적과 흑'을 정의하는 표현들은 다양하기만 하다.하지만 이 작품은 서가를 장식할 뿐인 지난 시대의 작품이 아니다.외로운 개인이 사회와 만나는 순간 반복되는 현장을 그리고 있는 오늘의 작품이다. 영웅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먼 옛날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지상에서의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올림포스로 올라간 존재를 영웅이라 했다.태생의 남다름과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의지와 능력으로 필멸라는 인간의 조건을 극복한 신인(神人)을 이름이었다. 그러나 신화의 시대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시대,더 이상 몽상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의 영웅은 어떤 존재일까? 섭리일 수 없는 힘이 개인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이 세계에 도전장을 던지는 순간 한 인간은 영웅의 몸짓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그 몸짓이 비극을 잉태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불길을 마다하지 않는다면,바로 그가 영웅 이 아닌가? 구체제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복원된 시대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쥘리엥 소렐이 영웅으로 숭배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프랑스 본토도 아닌 의지의 섬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온 유럽을 복속시킨 나폴레옹은,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기를 열망하는 모든 아들들의 생의 목표를 실현해낸 숭배의 대상이었다. 오직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적대적이기만 한 세계를 지배했던 한 인물이 왕정복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영웅이었고,그 우상의 모습처럼 이카루스의 비상을 꿈꾸다 추락한 이야기가 바로 스탕달 의 '적과 흑'이다. 수줍음을 타는 쥘리엥은 거칠기만 한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는 소년이었다.그러나 라틴어 성경을 모두 외울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이 미소년의 내면은 작가 스탕달의 기질처럼,격렬한 열정으로 넘치며,강렬한 감동을 추구하고,방종과 무절제를 옹호하며,공상 과 모험에 빠져드는 자기중심적 세계였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없는 그는 출세하지 못할 바에는 몇 백번을 죽고 말겠다고 되뇐다.결국 순진무구함으로 레날 부인의 모성애를 자극한 소년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혹은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부인의 침실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간다.또 명민한 두뇌로 심리분석에 능한 그는 욕망마저도 출세를 위한 철저한 계산 속의 하나의 항으로 환원하며,도도하기 짝이 없는 후작의 딸 마틸드를 공략해내고 만다. 레날 부인과 마틸드 사이에서 진정성과 위선을 넘나드는 사랑의 유희를 마다하지 않은 쥘리엥은 결국 레날 부인의 편지로 이카루스의 비행에 종지부를 찍게되고,격분한 그는 레날 부인을 저격 한다. 자신을 브장송의 수도원과 파리의 구체제 정치세력이 획책한 음모의 희생양이라 주장하며,재판정에서 신분질서의 타파를 역설하는 쥘리엥은 결국 감옥에서 레날 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며 평온한 죽음을 선택한다.자신의 목숨에 연연하기보다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 갈 것을 선택한 것이다. 쥘리엥은 분명 영웅이 아니다.하지만 그가 시도한 이카루스의 비상은 먼 옛날 영웅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가족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남다른 능력과 그로 인한 시련,신분 상승을 위한 끊임없는 날갯짓,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기존 질서와의 대적 등등.그러나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한 광란의 질주를 감행하는 쥘리엥의 이야기는 차라리 타락한 서사시라 불러야 할 것이다. 신이 의지와 능력은 주었으되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주지 않고,넘치는 힘은 주었으되 그것을 제어할 자제심과 행동 지침을 주지 않았을 때,영웅일 수 없는 아들은 신과 부모를 원망하며 세계와의 무모한 싸움을 시작해야 하고,타락한 서사시를 써갈 수밖에 없으리라.그 러나 그 무모함이야말로 백지 상태로 이 세상에 던져지는 모든 개인이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벌이고 있는 드라마의 원동력이고,곧 생명력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 <국민일보 98/04/07 이건우(서울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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