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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죄와 벌

지은이
도스토에프스키
출판사
청목사
페이지수
349
대상
『죄와 벌』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의 모순을 예리하게 묘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한 소냐의 사랑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는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인종을 제시한 것으로 전세계에 감동을 주고 있다. 독자서평 혼란스런 사회속의 정의와 부정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한 사회였다. 빈부의 차이도 극심하였고, 각종 부조리가 사회 전반에 나타났다. 작품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로서, 당시의 러시아 사회와 같이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정의와 부정의 개념을 어떻게 구분 지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대사회의 많은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일종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고 그에 분노하였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형편이 매우 어려워 하숙비 내기도 곤란할 정도였으니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분격은 두 사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더욱 커졌다. 바로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소피아(소냐)'이다.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고리대금업은 매우 가혹하다. 당시의 사회가 매우 어려웠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것은 뭇 사람들의 비난과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다른 한 사람,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피아 세묘노브나'는, 알료나와는 대조적으로 남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는 역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어이없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 가련한 인물이지만, 그의 딸인 소피야는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을 수양하는, 불쌍하지만 정말로 장한 인물이다. 그러한 두 인물에 대해 알게 되며 그 자신 역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점점 더 우울해졌음은 당연하다. 동시에 알료나 이바노브나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생충과 같았던,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별다른 목적성 없이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돈 역시 하나의 목표 내지는 제 2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알료나의 돈은 액수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묻어버렸지만 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자신이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살인 동기에는 우연히 듣게 된 알료나의 나쁜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극도의 불안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커다란 죄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불안은 남들로부터 그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데서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사회의 모습과 그 부조리에 크게 분노를 느꼈지만,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불안해하지 않을 만한 배짱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 그는 가족들, 즉 어머니 '뿔리헤리야'와 여동생 '두냐'와 다시 만나게 되며, 그들과 관련하여 '뾰뜨르 뻬뜨로비치(루진)'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 사람 모두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혼란, 부조리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루진은 돈과 권력이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비열하고 치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 계획적으로 부인을 살해하는, 그런 인물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가족과 소냐는 그 두 사람으로부터 농락을 당했다. 물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소냐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이 소냐의 마음에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설득, '뽀르피리'의 방문 등으로 결국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고 시베리아에서 8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두 사람은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숱한 사회경험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우울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몸을 팔면서도 항상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굳게 살아가는 소냐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가 소냐의 발 밑에 엎드려 소냐의 발에 키스했던 것, '전 인류의 고통 앞에 엎드렸다.'라고 말하던 것들은, 소냐의 영혼에 대한 감동과 연민, 그런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무뚝뚝하고 음울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자신을 따르리라는 소냐에게 감화되어, 대중 앞에서 센나야 광장에 엎드려 '자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맞춘다. 그는 그의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을 흘리며 환희와 행복을 느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감을 느낀 것은, 그 눈물이 그의 내부에 응어리진 죄의식과 고통을 풀어주는, 일종의 정화작용을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말은 하지 못하는데, 이는 군중의 조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명백한 죄의식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사람을 죽인 것은 죄이지만, 그의 생각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도 잘 사는 사람은 없어져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런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비뚤어져 있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 앞에 눈물 흘리며 소냐의 참사랑을 느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다. 소냐는 사랑과 헌신으로 그를 대했으며, 다른 죄수들 모두가 소냐를 어머니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소냐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한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더 나은 인간으로 새로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부조리는 남아있다.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참된 '정의'의 의미를 한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소냐처럼 한 인간을 진실로 사랑해준다면, 그 사람이 참된 사랑과 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진정으로 훌륭한 정의는 그렇게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서점 http://www.yes24.com / ramiwow 님이 쓰신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