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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지은이
신경림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페이지수
115
대상
산 일번지 창밖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이 들리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에는 많은 실루엣이 흔들린다. 하늘에서 점 하나로 우는 노고지리의 새된 비명은 지치고 어두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제6회 대산문학상,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 미디어 서평 삶의 끝자락 다시 안기는 어머니…/밑바닥 구석구석 질펀한 고통들/속삭이듯 편안히 껴안은 시어/허무와 고통 속 희망을 일구어내 우리 시대의 가객 신경림(63) 시인이 이순의 고갯마루를 넘어선 뒤에도 몇 년 뜸을 들이더니 최근에야 더 깊어지고 구성진 가락을 선보였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 5년만에 펴낸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 비평사). 56년 「문학예술」지에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이래 30여 년의 긴시력에 비해선 그리 많지 않은 7번째 시집이다. 지난번 시집이 허망하게 스러진, 뜨거웠던 한 시절을 목도하며 부르던 노래였다면, 이번 시집은 인생을 통시적으로 돌아보면서 이성과 이념의 푯대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세계를 시혼의 정수리를 붙들고 빚어 낸 가락들이다. 지분 냄새 풍기는 언어나 관념의 유희로서의 시가 아닌, 삶의 밑바닥 구석구석에 널린 질펀한 고통들을 껴안고 속삭이듯 편안하게 이끌어 나가는 시인 특유의 화법은 이번 시집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온 나라를 떠돌며 민요의 정서에 기대어 가꿔온 그의 가락이 중국과 베트남 등 물 건너 인생들까지 보듬어낸 것도 이번 시집의 특징이다. 시인이 굽이굽이 돌아온 세상의 골목길은 인생의 황혼녘에 이르러서 역설적이게도 유년기의 할머니와 어머니, 칸델라 불빛 아래 일렁이던 그들의 그림자로 돌아간다. 표제 작은 그 인생의 미망을 폭넓은 울림으로 전해준다.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 나는 대처로 나왔다. (……)/하지만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 엣」중에서) 지나온 세월 동안 나름의 튼튼한 집을 세웠다고 믿었지만 시인은 먼길을 돌아와 「기둥도 벽도 형체도 없는 그 집이 /오도카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한다. 모두들 서둘러 내린 빈 찻간에서 신호등도 없는 간이역을 바라보며 상여소리를 듣는다. 한 세상 서럽게 고생고생하던 이모의 저승길은 비장한 노랫가락으로 배웅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른나무에 눈발이 내려치는 날, 세상은 무너지고 딸은 앓아누웠는데」도 「대낮부터 술추렴을 하는 배추장수며 젓갈장수와 어울려 얼큰한 장국밥에 겉절이를 얹어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 그러나 시인의 절망과 한숨은 비통 자체에 함몰하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을 토해낸 뒤 그는 맹목적인 희망이 아닌, 인생을 깊이 관통해온 자만이 건져낼 수 있는 희망을 곳곳에 투사한다. 비틀리고 일그러진 못생긴 나뭇가지들이 피워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얼어붙은 비탈길의 쓰레기차」와 「시퍼렇게 터진 손」과 「찌그러진 작업화」가 맺어낼 「농익어 단 열매」를 연상한다. 노고지리의 비명소 리에서 절망과 한숨 속에 단련된 새 희망을 듣는다. 『좀체 마르지 않는 /피와 눈물을 가슴속에 묻고 /아물 줄 모르는 상처를 감추었다 /그런 다음 /오랜 나날 바람막느라 누더기 다 된 /두껍고 낡은 깃털들을 벗어 던진다 /어둡던 시절에 익힌 /거친 말들을 버리고 /비바람 속에서 부르던 노래들마저 잊는다 /그리고 비로소 너는 //잠든 대지를 흔들어 깨우는 /맑고 새된 비명이 된다 /텅 빈 봄하늘을 점 하나로 가득 채우는 /노고지리가 된다 //땅 위에 내려꽂혀 /딱딱하게 굳은 씨앗을 깨는 날렵한 /몸짓이 된다』(「노고지리」 전문) <세계일보 98/03/13 조용호 기자> ‘간절한 대화’로 푼 떠돌이 삶의 회한/소시민의 자화상 정경교융의 세계/그리고 처절한 아름다움/물 흐르듯 농익은/그러나 마냥 편할 수 없는 우리네들 이야기「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일찍이 그가 자신의 시 「파장」에서 그랬지만, 우리는 신경림(63) 시인의 시한 구절만 읽어도 흥겹다. 그 흥겨움은 그의 시가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이 읽기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서사와 서정이물 흐르듯이 하나가 되고, 경과 정이 어디 어긋난 데 없이 조화롭게 융화되는 「정경교융」의 세계(도종환 시인의 말)야말로 신씨의 시가 보여주는 미덕이다. 그가 7번째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발행)을 묶어냈다. 「쓰러진 자의 꿈」(93년) 이후 5년여 동안 써 온 60편의 시를 모았다. 한 달에 한 편 꼴의 과작으로 발표한 시들이다. 그는 시집을 내면서 『시에 대한 생각이 옛날 같지 않다』고 말했다. 『요즘은 갈수록 시는 「간절한 대화」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상대방과 마주보며 대화하듯 풀어놓으니 그의 시는 쉽고 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편안한 시구 속에 새겨둔 의미는 결 코 독자를 편하게만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나는 빚을질 일을 하지 않았다,/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했고/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시인은 문득 깨닫는다.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아버지의 그늘」 부분).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인 우리들의 자화상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어릴 적 살았던 산읍(산움). 그 곳의 광산도 색시집도화약장수도,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온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입을 꾹 다문채」 끓여주던 술국도, 「집안이 망했다고 종종 주먹질을 해댔」던 할머니도 없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은 회한일 것이다. 신씨의 새 시집에는 이렇게 여전히 떠돌이처럼 길 위에 서 있는 시인의 회한을 담은 시편들이 많다. 그가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지난 5년이란 『몰락한 사회주의를 현장에 가서 목도도 하고, 우리 자신이 거덜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겪기도 한』 세월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시집에는 그가 나라의 산과 들을 떠돌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가」 중국과 베트남, 일본 땅도 밟으면서 건진 시편들이 함께 실려있다. 그러나 내면으로 침잠해버린 듯 보이면서도 그가 「농무」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신명,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일깨웠던 처절한 아름다움은 이번 시집에서도 농익어 살아 있다.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흔적」 부분). 그에 따르면 우리는 산비알에 서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들이다. 서로에게 「곁」을 주어야 한다. 신씨는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93∼94년에 이어 두번째로 맡은 일이다. 그는 『출판계가 쑥밭이 되고 글 쓰는 이들이 일할 터전이 무너졌지만 좋은 문학을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문인의 존재이유』라며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98/03/11 하종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