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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모두에게 외치고 있는데 사방이 막혀서 그러질 못한다
글쓴이 이경은
소녀는 방금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소녀의 앞에 벽이 세워졌고 소녀는 고립되었다. 그렇게 소녀는 외로워졌다. 그런데 그것은 남이 볼 땐 아주 사소한 상황이라 소녀는 외로움의 이유를 말하기 존나 부끄러웠다. 얼굴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말하겠다. 왜냐하면 소녀는 지금 자신이 작은 것에 상처받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해서 아무도 소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 말했는데 건드리는 새끼가 있다면 소녀는 그 새끼를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소녀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는데 건드리는 새끼가 있다는 것은 그 새끼는 소녀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쁜 새끼라는 뜻이고 이 나쁜 새끼 하나 때문에 소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해해달라고 끄집어낸 모든 말들이 다 무효가 되버리고 헛수고가 되버린다는 뜻이고 그러면 소녀는 허무해지고 상처받을 테니까.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준 나쁜 새끼에게 복수를 계획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죽이고 싶어질 것이고 그러면 진짜로 죽이게 될 테니까. 그러니 니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 하는 척이라도 하렴, 그러면 내가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단다, 하고 소녀가 통보한다. 통보를 마친 소녀는 당당해졌다. 소녀의 빨간 얼굴은 다시 뽀얘졌다. 뽀얀 얼굴이 되서 예뻐진 소녀는 당당하게 얼굴을 치켜들고 앞에 세워진 벽에 대고 내 외로움을 알아달라고 소리치기로 했다. 소녀를 혼자 남긴 벽이다.


소녀는 초코케이크가 먹고 싶었는데 동생이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소녀가 이겼는데 엄마가 난 니 동생처럼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단다, 하고 말하는 바람에 소녀의 정정당당한 승리가 무효가 되었다. 동생은 좋아서 엄마의 팔짱을 꼈고 엄마는 팔 사이로 쑥 들어온 동생의 손을 잡았다. 둘은 결합되었고 소녀만 떨어져나갔다. 소녀는 이제 완전히 왕따가 되었다.


너무 사소한 것 아니니, 하고 벽이 물었다.
니가 뭘 알아, 하고 소녀가 소리쳤다.
신기하다.
뭐가.
너 목소리 너랑 닮았어.
뭐?
내가 모르는 게 뭔데.
안 그래도 나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외면을 당했으니 이제 나는 완전한 왕따가 된 거고 그래서 존나 외로워. 이제 날 이해할 수 있겠니.
벽이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빤히 봐.


신기하다.
정말 닮았어.


소녀는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밝게 유지하기 위해 생각을 전환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소녀는 나는 이제 완전히 왕따가 되었구나, 와 같은 생각 대신 나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소녀는 나는 독립적인 개체이니 자유의 몸이구나, 나는 자유의 여신상이구나! 하며 말도 안 되는 말들의 꼬리들을 물고 물면서 마구마구 밝게 떠오르는 단어들을 어떻게든 연결하려 했으나 소녀는 금세 외로워졌다. 왜냐하면 소녀는 안 그래도 자신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데 씨발 이런 사소한 상황에서도 왕따를 받으니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고 범지구적인 왕따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녀는 내가 너무 사소한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니야! 내 친구들은 내가 밥을 느리게 먹는다는 이유로 나의 뺨을 마구 후려치잖아! 내 친구들은 나보다 다섯 배 정도 예민한 게 틀림없어,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소녀는 울 뻔했다. 왜냐하면 그 때의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밥 아껴먹으려고 일부러 존나 느리게 먹는 돼지 같은 년이라면서 친구들이 소녀의 뺨을 때릴 때 소녀의 눈앞으로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잠긴 문들이 생겼을 때의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십만 개의 벽을 드릴로 뚫고 수천만 개의 잠긴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젖히지만 잠긴 문들이 또다시 마구마구 생겨나는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녀는 그 때 느낀 그 공포가 방금 소녀가 겪은 상황에서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실에서 고립이 된 공포와 빵가게에서 고립이 된 공포는 별반 다르지 않다! 친구들에게 뺨을 맞아서 고립이 된 공포와 엄마와 동생이 한 편을 먹어서 고립이 된 공포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 사건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립을 느꼈는데 씨발 가족에게조차 고립을 느껴서 내가 아예 뜯어져나간 빵 귀퉁이 더러워서 먹지 않는 과자 부스러기 남아서 그릇에 눌어붙은 돈까스 양념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 존나 무서웠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들은 모두 ‘왕따’를 말하고 나는 이것들이 되는 것이 공포스럽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들이 된 것처럼 느꼈으니까 나는 이미 이것들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나는 '왕따'라는 거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왕따다! 유레카! 하며 소녀는 박수를 쳤다. 그러나 여전히 소녀는 이것들이 되는 것이 공포스러워서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용기를 내서 외쳤다.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소녀가 싫어하는 생크림케이크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아, 나는 완전히 버려졌구나, 하고 소녀가 생각했다. 소녀의 앞에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잠긴 문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소녀는 다시 수십만 개의 벽들을 드릴로 뚫고 수천만 개의 잠긴 문들을 하나하나씩 열어젖히며 나는 사랑이 필요하다!를 허우적대면서 외쳤다.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있는 것은 뜯어져나간 빵 귀퉁이 더러워서 먹지 않는 과자 부스러기 남아서 그릇에 눌어붙은 돈까스 양념이었고 이것들은 새로운 수천만 개의 잠긴 문앞을 막고 있었다. 너무 외쳐서 허기가 져버린 소녀는 그것들을 모두 먹어치웠고 배가 불러왔다. ‘왕따’들을 너무 먹어서 소녀는 '왕따'처럼 변해갔고 '외로움'을 너무 먹어서 더 외로워졌다. 그러면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잠긴 문들이 자꾸만 새롭게 생겨나 소녀의 눈앞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그래서 소녀는 또다시 벽들을 드릴로 뚫고 잠긴 문들을 하나하나씩 열어젖히며 나는 사랑이 필요하다!를 외치지만 엄마와 동생은 소녀만을 빼고 꼭 결합되어 사랑이 필요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그런 형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소녀는 모두에게 외치고 있는데 사방이 막혀서 그러질 못하고 있는 꼴과 같고 모두에게 외치고 있는데 사방이 막혀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아우성치고 있는 소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꼴과 같은 것이다. 소녀는 나는 사랑이 필요하다!를 벽 바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듣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두 개의 드릴로 수십만 개의 벽들을 뚫고 팔 힘을 길러서 수천 만개의 잠긴 문들을 열쇠도 없이 열어젖혔고 또 다른 문들을 열기 위해 '왕따'들과 '외로움'들을 먹어치웠다. 소녀는 먹고 열고 먹고 열고 먹고 열고 먹으면 또 먹어야 하고 그래서 또 먹고 열고 먹고 먹고를 반복하다가 너무 배가 불러서 결국


여길 나가고 싶어, 라고 소녀가 고백했다.
그러자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문들은 이렇게 답했다.
신기하다.
뭐가.
너 목소리 너랑 닮았어.
왜 아까부터 그 소리야.
정말 닮아서 그래.


신기하다, 정말 닮았어, 하며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문들은 수십억 개의 입들을 가지고 연방 외쳐댔다. 수십만 개의 벽들과 수천만 개의 문들은 호기심 어린 수십억 개의 눈알들을 굴리며 소녀와 소녀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소녀의 목소리와 소녀는 정말 꼭 닮아있었다. 소녀가 외치면 목소리는 벽들에 부딪치고 튕겨져 나와 허공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부딪치고 튕겨져 나오고 떠돌아다니고 그러다가 다시 부딪치고 튕겨져 나와서 떠돌아다니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꼭 소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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