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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환상경계, 비, 나비, 봄비.
작성자 김희연(고1) 작성일 2003-10-07
작성일 2003-10-07
1. 봄 비



늦부른 봄비가 마른 하늘을 적시기 시작했다.

영신은 눈썹에 걸려 출렁거리는 빗물을 가볍게 털어낸다. 봄빗발이 꽤 세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한다.
비는 차갑기 그지없지만 채색하듯 도심의 한 가운데를 때린다.

그녀는 휘젓듯 비 사이를 걷는다. 신경 곳곳이 허파로 연결되어 비로 숨 쉬는 것 같다.
심호흡하듯 비를 들이마신다. 풋냄새나는 물안개처럼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린다.

이제 도시는 빗물에 젖어 흐른다. 꼿꼿이 걸어가는 그녀의 몸에도 빗물이 흐른다.
불긋한 블럭길을 통통거리며 발돋움한다. 도시의 소리. 향긋한 봄 리듬에 맞추어 뛴다.


비가 멈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하늘에서 눈을 뗀다.

물웅덩이의 음율과  똑딱거리는 비울음 그 가운데 나비가 있다.
반투명한 호수빛의 나비다.

  "화려하다!"

영신은 탄성을 질렀다. 쏟아지는 물길 속에서 나비는 빛난다.
나비가 비가 되고 비가 나비가 되어 말한다. 그 찬란한 보석의 날개를 미동조차 않고는.

  -나는 지킴이야

영신은 살풋 웃는다. 신기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지킴이?"

영신은 나비에게 한 걸음 당겨 헤엄치듯 빗살을 헤친다.

  -환상의 지킴이

나비는 다시 말한다. 영신은 앗 하고는 주위를 살핀다.
젖은 눈에는 오직 비속 도시가 보인다. 결코 사람이 없는.

영신은 나비를 응시한다. 나비는 조금 웃는다.
그녀는 비로소 약간 찌푸린다.

  "다시 원래대로 해 놔"

흐르는 빗물을 투영한 나비는 한바퀴 돈다.
빙그르르─
물의 향기가, 그 청량한 환상의 향기가 난다.

나비는 빛을 발하며 묻는다.

  -정말?

영신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찰박거리며 올라온 물방울이 비에 섞여 뺨을 때린다.
고요한 비의 소리만 그녀의 귓잔등을 간지럽힌다.

조금 아프다. 영신은 되뇌였다. 아파. 아파. 그녀는 이슬 걷힌 눈을 감았다.

나비는 또 다시 웃는다.

  -다시 볼 수 있을거야

영신은 화들짝 눈을 뜬다.

북적거린다.
비가 개인 도시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분주하다.
경적을 울린다.

영신은 눈을 감고 나비를 찾는다. 그러나 없다.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2. 소나기



지글지글─
프라이팬 소리에 잡음이 섞인다.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다.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영신은 요리를 멈추고 창 밖을 본다.
백일홍이 피었다. 그 멀리에는 푸른 벼의 출렁임도 보인다.

기상캐스터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다. 신경질적으로 이어진다.

  …북부 지방은 구름이 끼겠으나 남부 지방은 구름이 조금 낀 맑은 날씨게 되겠습니다 바다의 물결은…

영신은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간다. 전원을 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구름이 껴 있다.
그녀는 다시 나비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점점이 흩어진 햇살을 본다. 눈이 아프다. 영신은 작게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중얼거린다.

  "소나기…왔으면 좋겠는데"

올 리가 없다. 맑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닫았다.

눈꺼풀 사이로 발간 빛이 느껴진다.
새 소리, 나무소리, … 나무 사각거리는 소리.
어느때인가 그림자가 진다. 꺼풀 위로 드리워지는 회색빛의 남푸름이 보인다.

그녀는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본다. 새카만 구름이 흘러온다.
영신은 흐름에 맞추어 미소를 띄운다.


빗방울은 곧 떨어졌다. 귓바퀴에 떨어진 비는 삼켜지듯 그녀의 귓구멍으로 흐른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흘러내린다.

퍼붓듯 온다.

그녀는 간절하게 서 있다.
그리고 나비가 온다. 물빛을 퉁기며 온다. 춤추며 날아든다.


나비는 또 웃는다.

  -오랜만이야 안녕?

시야가 가려질만도 하다. 그러나 나비의 전신이 투명한 돋보기로 보인다.
나비는 날개를 퍼덕인다. 푸른빛이 남실거린다.

숨쉬기 곤란할 정도의 물이다. 영신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묻는다.

  "환상을 지키는 거야?"

나비는 은색의 화사함을 뿌리며 한바퀴 돈다. 유영하듯, 느긋하게.
나빈 비로 말한다.

  -응. 나는 환상을 지켜. 나는 환상 지킴이야

영신은 묻는다.

   "환상을…아니, 환상은 빼앗기면 안 되는 거야?"

나비는 대답한다.

  -환상이니까. 그리고 이미 너는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어

영신은 입가 코에 짓쳐드는 비에 숨을 할딱인다.
그것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영신은 울고 있다.

비, 悲, 나悲, 슬픔? 슬픔이다. 나비는! 생각하는 것 조차도 너무나 힘들다.

또 영신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영신은 자신이 이토록 대화를 나누는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시 영신은 환상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눈을 돌렸다. 백일홍이 떨어져 있다.
열매보다는 꽃이 좋아. 영신은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키고 있는 환상을, 환상을 찾으며!"

영신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몸이 떨린다. 주저앉고 싶지만 질 수 없다. 영신은 입을 앙다문다.
나비는 이제 조금 멈춘다. 그 빛은 사그라드는 듯 하다. 그러나 푸른 빛이 응축된다. 백색이 되어간다.
또 다시 나비는 웃는다.

  -알겠어? 환상은 힘이야. 응?

영신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순백의 날개를 본다. 빛나지는 않는다. 분명, 분명, 화려하지는 않다.

…따뜻해.

입가에 덧씌워지는 웃음에 영신은 놀란다. 얼굴을 더듬어 본다. 분명 웃고 있다.
믿겨지지 않는 듯 그녀는 조금 눈을 돌려본다.
그 물속 세상은 알싸한 향기가 난다. 그리고 춥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그 백색의 물안개.

나비가 사라졌다.

그 아름다운 경계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신은 이제 서 있지 않는다.
그녀는 퉁기듯 일어난다.

힘차게 일어난다.







3. 나비



물빛으로 반사된 햇살이 포근하다.
사각거림…나무의 사각거림.
새소리, 풀 뻗는 기지개울음.
휘어지는 물고기의 은색 몸.

나비, 나비는 없다. 사실, 나비는 비 오는 날에 날 수 없잖은가?

영신은 떨어지는 습기를 애써 숨긴다.
비, 悲, 힘.


그렇기에, 비는 나비의 눈물. 그 아스라한 경계의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