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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할머니와 빨간스웨터
작성자 이유나 작성일 2003-08-21
작성일 2003-08-21
할머니와 빨간스웨터

                                                   중학교3학년  이유나


어느덧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다.
여느때와 같이 오늘도 난 학교에서 나와 좁다란 골목길을 지나 꼬불꼬불 한참이나 펼쳐진 조그마한 옷가게를 지나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그 옷가게 앞의 일렬로 펼쳐져 있는 헹거엔 빨간 털실이 깔끄러워 보이는 스웨터가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아 한적해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던 옷가게 앞에 허리가 반쯤 굽어 힘들어 보이는 어떤 할머니가 서 계신다. 그 옆엔 한 손가락으로 빨간 스웨터를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조그마한 손이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는 8살쯤 되 보이는 꼬마아이가 있다.
할머니를 향해 미소짓고 서 있는 꼬마아이는 천진난만한 천사 같아 보였다.
손자의 환한 미소가 마음 속 깊은 곳의 근심까지 말끔히 씻어주었는지, 힘들어 보이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어난다.
  "우리 할무이야∼! 이 빠알간 스웨터 이뿌죠?! 할무이랑 아∼주 자알 어울릴 거 같아∼!! 내가 할무이 사줄거예요! 히히히..."
  "기특한 우리 똥강아지... 할머니는 괜찮아. 그니까 맛난거 많이 사먹으렴... 우리 강아지가 행복한게 할머닌 제일 좋으니깐..."
  "할무이야∼!! 난 우리 할무이가 이 빠알간 스웨터 입고서 날 보면서 웃어주는게 제일 행복할 거 같아∼요!!"
아마 이 꼬마아이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돈으로 할머니께 빨간 스웨터를 선물하려는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있는 나의 눈엔 왜 눈물이 맺히는지...
환하게 웃으셔서 웃는 모습이 마치 하회탈 같았던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왜 떠오르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난 멈춰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마음의 울적함을 지워버린, 구름 한 점 없이 뻥 뚫린 맑은 이 하늘.
좁아서 답답해 보이던 이 길의 하늘이 아름다운 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알 것만 같다.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장 따사로운 기억이란 걸, 행복이었단걸 이제야 알 것 같다.

- 어린시절 회상 -

초등학교 4학년. 오늘은 1월 1일 설날이다.
  "민아, 할머니 댁 가야지. 빨리 옷 입으렴.."
  "민아, 꾸물거리단 늦는다! 늑장피우지 말고..!"
명절만 되면 우리 식구는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간다.
시골로 내려가는 아빠의 차 안에서 엄마는 항상 내가 아주 어렸을 때, 1∼2년 쯤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나를 키워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아마 몇십번은 말씀하신 것 같다. 이렇게 매일같이 엄마는 말씀하시지만 난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만 타면 잠을 자는 나.
  "민아...! 유민! 일어나야지!! 다 왔어!"
엄마의 외침에 잠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나는 깨어났다. 밖을 보니 어느새 칠흙같은 어둠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벌써 다 왔구나...
서두르라는 엄마 때문에 빨리 차에서 내렸다.
아직은 차가운 이 바람을 타고 내 코를 찌르는 냄새와 시끄럽게 짖어대는 똥개 이쁜이가 날 반겨준다. 너무 짖어대는 이쁜이 때문에 나는 머뭇거리며 못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녹슨 쇠 같은 색의 나무대문이 열렸다.
허리가 굽으셔 힘들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신 듯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가 손짓을 하시고 계신다.
  "우리 강아지. 민아! 빨리 오렴.. 이 할매가 많이 기다렸단다..."
새빨간 홍시를 연상시키는 스웨터를 입으신 할머니가 양팔을 벌리시고 내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할머니는 내가 정말 많이 보고싶으셨나 보다. 할머니는 나를 꽈악 안아주셨다.
할머니의 품에서 무슨 냄새가 났다. 음... 무슨 냄새지? 잘 모르겠다. 내가 냄새를 맡고 있다는걸 아셨던지 할머니는 과일 냄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민이 먹으라고 많이 갔다놨지.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모른단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손이... 너무나 거칠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셨으면 이렇게 거치실까...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마루. 넓고 깨끗해서 내 마음이 후련하다.
엄마 아빠는 벌써 옷을 갈아입으시곤 과일을 드시려하신다. 부엌에선 외숙모와 외삼촌이 나오셨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모두 마루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었다.
  "민아, 지금 방학 기간인데 할머니 댁에서 놀다 갈래?" 엄마가 물어보신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물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 올라가 봐야지. 그래도 자주 올테니까 걱정마."
  "치... 진짜지?"
  "그래. 자주올게." 괜할걸 걱정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빠가 대답하셨다.
  "우리 이쁜 강아지 민이, 똑똑하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잖아." 할머니가 인자하게 웃으시며 말씀   하셨다. 웃는 모습이 하회탈 같으신 할머니 얼굴을 보니 여기에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순간 받았다.
이틀동안은 엄마, 아빠가 머물러 계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 산소도 찾아가 뵙고, 절도 하고 기도도 했다. '우리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우리 가족 지켜주세요...' 하고 말이다.
엄마, 아빠는 서울로 올라가시고 나는 할머니 곁에 남았다.
할머니 일도 도와드리고 같이 시장에 나가 할머니가 과일을 파는 것도 보고 오곤 했다.
  "할머니, 나 과자 먹고 싶어. 음... 옷도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렇구나, 민아... 이 할매가 예쁜 옷 사줄게."
내가 해달라고 하는 건 항상 해주시려 노력하셨다.
집에서는 항상 나를 챙기시고, 밥을 안 먹을 땐 달래서 꼭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하셨다.
  "민아, 밥먹어야지!"
  "싫어. 나 안 먹어. 먹기 싫어." 난 항상 밥을 먹을 때면 먹기 싫다고 말한다.
  "민아, 그래도 먹어야지. 그래야 건강하지. 아파서 병들면 안되잖아."
할머닌 항상 이런 식으로 날 달래곤 하신다.
이제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 되었다.
엄마, 아빠는 날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고, 그래서 난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 할머닌 왜 항상 과일냄새가 베어있는 그 빨간 스웨터만 입어?"
항상 똑같은 스웨터만 입으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궁금해했던 것이다.
  "음... 그건말이지, 민이 할아버지가 이 할매한테 준거란다. 마지막 선물로..."
  "아... 그렇구나. 그래서 매일 이 스웨터를 입으시는 구나..."
쓸쓸해 보이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 한 구석도 저려온다.
할머니에게 항상 가졌던 궁금증을 난 이렇게 해결했다.
엄마, 아빠가 오셨다. 이제 할머니와 헤어질 시간이다.
  "민아, 이제 가야지...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엄마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신다.
  "민아, 이 할매가 민이 먹으라고 반찬이랑 과일 많이 실었다. 그니까 가서 맛나게 먹어야 한다! 이 할매 생각도 하믄서... 알겠지, 민아?"
  "알았어. 할머니. 나 갈게..." 짧게 대답을 하곤 아빠 차에 올라탔다. 엄마, 아빠는 할머니와 얘기를 더 하다가 차에 오르셨다. 할머니가 내가 앉은 쪽 창문을 두드리신다. 왜 그럴까? 난 창문을 내려서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혀진 만원짜리를 꺼내 내 손에 쥐이신다.
  "민아, 이걸로 맛난거 사먹어..."
  "웅.." 할머니의 행동에 엄마는 뭘 그런걸 주냐면서 다시 되돌려 주시라 하셨다. 할머니는 됐다고 하시며 민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셨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알았다며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민아, 잘가렴!"
  "웅..." 난 짧게 대답했다.
집에 도착하고 며칠 뒤 학교에 갔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그래서 전보다 바빠졌다. 매일을 바쁘게 보낸다. 그 때, 시골에 다녀온 후론 명절 때 다시 내려가 본 적이 없다. 학교에. 학원에 치여 갈 시간이 없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마찬가지로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 할머니께 전화도 왔지만 난 학원에 있는 시간이라 받지도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 아빠는 전화를 받곤 어딜 급하게 가셨다. 단지 나에겐 누가 아프다고만 말하고... 왠지 계속 걱정이 되었다. 왜 내 마음 한구석이 아파오는지...
며칠 후, 밤 늦은 시간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일부러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셨다나... 그래서 전화했다고... 갑자기 눈 앞이 까매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
  "민아! 문열어.!! 빨리 내려가야지..!!" 한참을 그냥 앉아있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곤 문을 열었다. 엄마에게 끌려 내려갔다. 어느새 난 시골의 병원에 와 있었다. 할머니가 너무 위독하셔서 큰 병원으로 옮겨도 가망이 없다고 하셨단다. 싸늘하게 느껴지는 이 분위기... 너무 마음이 아프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온 걸 아셨는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통통하던 그 얼굴이 비쩍 말라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미...ㄴ...아..." 할머니의 쓸쓸하고 안 되 보이는 그 얼굴을 보고서 난 그만 주저앉아 할머니께 매달리고 있었다.
  "할머니.. 이런게 어딨어... 뭐야... 나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면 어떡해... 이러면... 나... 어떡해... 할.....머......니.........."
  "민...아... 이 할매가... 없어도..... 자....ㄹ... 할 수.... 있....는.........거......지...? 그래야........ 이 할..매.....가 편....할 거 같.....아....."
  "알았어, 할머니... 할머니 죽지만 마.... 할머니 매일 보지도 못하고..... 다 나때문이야... 할머니... 안 돼... 죽으면 안 돼... 앞으로 할머니 뵈러 자주 갈게... 아니, 할머니 옆에서 지낼래... "
  "민아... 이.....제 할매... 편하게..... 갈... 수.... 있겠다.... 민아... 할매가...... 지켜줄게... 잘 자라......야 한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사람들이 다 달려온다. 내 손을 꽉 쥐고 계시던 할머니 손에... 힘이 없다. 지금 내 눈엔 아무것도 안보인다...
며칠 전 할머니의 장례를 치뤘다. 난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은 채로... 난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할머니와 꼬마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린시절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왜 난 저 꼬마아이처럼 할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했을까... 왜 그랬을까... 혼자 이기적이었을까...
꼬마아이의 성화에 할머니는 웃으시며 빨간 스웨터를 입어 보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 눈을 적신다...
난 하늘을 바라보며...
  '할머니... 할머니... 잘 있지? 나... 할머니 보고싶은데... 나... 후회되는데.... 할머니... 날 항상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는거지? 나... 할머니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이제 할아버지랑...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 그래서 나 바라보고 있지? 할머니... 행복해야돼... 할아버지랑... 꼭 행복해야해....'
많이 큰 지금도 난 할머니께 존댓말을 안 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할머니께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인지...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날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워져서인지....
  '그럼... 이 할맨... 항상 우리 민일 지켜보고 있지... 우리 민이 아무일 없도록... 이 할매랑 할아버지가 지켜주고 있지... 걱정마렴... 민아...."
내 마음을 다 읽으셨는지... 어느새 내 귓가엔 할머니의 숨결이 느껴진다. 환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는 할머니가 보인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의 목소리에 기운을 되찾고 이렇게 다시 말했다.
  '할머니! 사랑해! 항상 나 지켜줘야 돼...! 나중엔 내가 할머니 지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