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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케이티의 전쟁-3
글쓴이 최효서
넓은 세상에서 혼자가 된 케이티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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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는 굵은 나무 뿌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양말을 벗어서 물기를 짰는데 케이티가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에 앉으면 늘 하는 버릇이었다. 젖은 양말을 신고 있으면 축축한게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였다. 케이티는 작은 손으로 양말을 짜면서 눈앞의 강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하긴, 플루에서는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케이티는 눈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죽 따라가 보았다. 물은 폭포가 되어 밑으로 떨어지며 더 멀리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양말을 신었다. 신발은 잃어버린지 오래였으므로 신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날 게 뻔했지만 지금은 그 걱정도 되지 않았다. 일어나서 한 걸음 한 걸음 강을 따라갔다. 잿빛 나무 한 그루가 부러진 채 강의 잔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케이티는 아무 생각없이 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다. 양말에 다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잿빛 나무 쪽배를 따라가려면 더 빨리 걸어야했다. 그 두려운 순간에 케이티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었다. 이제 케이티는 더 이상 어른처럼 자기 일을 척척 알아서 해내는 꼬마 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에 진짜 열 살짜리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열 살이라는 나이는 장난기와 태평함을 찾게 해주었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다.
강은 어느 틈엔가 물결이 세지고, 케이티는 그 세진 물줄기를 따라 뛰어 내려갔다. 길을 막고 있는 나무의 잔 뿌리들을 뛰어넘고, 나무구멍이 나오면 돌아서 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계속해서 나무 쪽배만을 보고 있어서 그녀는 물이 급경사를 타고 허공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폭포 옆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침 절벽에서 튀어나와있던 케이티의 몸보다 굵은 가지에 올이 풀린 양말이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무 한그루와 함께 떨어져 밑에 있는 바위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케이티는 머리를 밑으로 한 채 두 팔과 다리 하나를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이제 난 죽었어!"
그 말은 조금 전에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까의 경우는 어떻게 할 지 몰라서 한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나온 말이었다.
케이티는 기적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굵은 가지에 걸려 있는 발이 온몸을 지탱해 주었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양말이 서서히 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부드러운 느낌이 그때는 그녀를 왜 그렇게 두렵게 했을까! 양말이 굵은 가지에 단단히 걸려 있어도, 케이티의 몸은 천천히 허공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허공?
케이티는 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짙푸른 공간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군데군데 푸른 반사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케이티의 궁금증을 불러들였다. 현기증이 나고 기운이 빠진 케이티는 10초 동안 눈을 감았다 떳다.그러고 나자 그 허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키의 4배 정도 떨어진 곳에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보는 넓은 호수, 놀라웠다.
달빛이 호수에 비쳐 여기저기 푸른 빛을 뿜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키가 큰 풀들이 잡목을 이루고 있었고, 그 주변에 하얀 나무 껍질이 해변처럼 펼쳐져 있었다.
케이티가 계속 따라왔던 강은 바로 이 호수로 떨어지고 있었다. 강물은 폭포를 이루어 맑은 물 위에 하얀 거품을 만들어냈다. 케이티는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마구 뛰던 심장 박동이 차츰 가라앉았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양말이 발에서 점점 미끄러지다가 멈추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지에 발이 걸린 채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토비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늘 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를 쓰러트리는 건 오직 두려움 뿐이다."
케이티는 아버지가 그 말을 들려줄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누군가를 무섭게 하면 그가 놀라 땅에 쓰러진다는 뜻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 케이티는 그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굵은 가지에 온 몸을 지탱하며 매달려 있던 그녀는 오직 두려움에만 떨며 곧 죽을 거라는 생각에 몸을 허우적 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양말에 발에서 스르르 빠져나왔던 것이다. 밑에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추락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고, 두려움이 사라지자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게 된 것이다.
케이티는 먼저 몸을 굽혀 한손을 다리 쪽으로 굽혔다. 그리고 꺼칠꺼칠한 나무 가지를 움켜 쥔 다음 다른 한 팔을 마저 뻗어 두 팔로 나무 가지를 붙잡았다. 몇 초만에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바뀌어 두팔로 나무 가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조금 더 힘을 쓰자 두팔로 굵은 가지를 지탱하고 허리 부분을 가지 위까지 들어올릴 수 있었다. 플루를 한 달 동안 왔다갔다 돌아다닌 덕분에 어린 곡에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가지 위에 서서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 보았고, 호숫가를 탐험하겠다는 모험심에 불타게 되었다. 나뭇가지를 타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 호숫가로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그녀는 '뭐, 별거 아니네.' 라고 생각했다.
호숫가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 위대하고 웅장했다. 키가 큰 풀들이 작은 숲을 이루며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때때로 소금쟁이들이 물 위를 톡톡 뛰어다녔다. 호수는 아주 넓었다. 헤엄쳐서 건너편으로 가려면 1시간은 걸릴 듯했다. 태어나서 좁은 강물(이 호수에 비하면) 밖에 보지 못했던 케이티는 더욱 신비로움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옷을 벗을 생각도 못한채 그대로 덤벙 물속에 뛰어들었다.
물은 차가웠다. 마지막 햇빛이 물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케이티는 사방에 물을 튀기면서 서투르게 헤엄을 쳤다. 그녀는 호흡을 빨리 하며 발이 땅에 닿는 곳으로 곧 돌아갔다. 그러고는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곳에 멈춰 서서 짙푸르고 거대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밑에 작은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듯 했다. 케이티는 이상하게도 거기서 풍요로움과 안전함을 느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정말 아름답지?"
"응, 정말 아름다워."
케이티가 대답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야."
"맞아, 이런 곳은 처음인걸."
대답을 하고 나서 그녀는 깜짝 놀랬다. 어, 내가 누구와 이야기 한거지?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와 이야기를 했었다. 틀림없이 케이티는 누군가에게 대답을 했었다.
그 누군가는 갈색 머리를 엉클어트렸지만 짧은 머리를 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년은 키가 큰 풀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얼굴로 보아 케이티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선은 훨씬 더 어른스럽고 훨씬 더 자신감에 차있었다. 매일보던 아버지의 그 얼굴과 비슷했다. 케이티는 꼼짝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는, 어떻게 하면 이 차가운 물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 아이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곳 만큼 아름다운 곳은 꼭 한군데 뿐이야."
소년이 말했다.
"그곳이 어딘데? 여기서 멀어?"
케이티가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손을 초록색 바지 주머니 안에 넣고 있었다. 케이티는 다른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몇 분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질문을!
"네가 꼬마 엘이니?"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매우 신선했다. 케이티는 그 미소가 마음에 쏙 들었다.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미소였다. 본래 사람들은 네다섯 살이 되면 미소가 차츰 줄어드는 법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미소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런데 이 소년의 미소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짓는 것 처럼 산뜻했다.
"내 이름은 데이브야."
물 속에 있는 케이티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말을 이었다.
"난 꼬마 엘을 찾고 싶어."
소년이 또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 똑같은 미소를.
"너 춥겠다."
"응, 추워."
케이티가 오들오들 떨면서 말했다.
"그럼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해?"
"응"
"그렇게 오래 있다가 감기라도 들면 난 몰라!"
"알아." 뭘 알겠다는 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케이티는 순순히 걸어나왔다.
데이브는 머리가 그다지 길지 않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아주 태연했다. 내가 춥지 않게 빨리 나와서 다행이라는 표정뿐이었다.
케이티가 그의 옆에 섰다. 두 아이는 호수 위에 꽂히는 마지막 햇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줄 알았는데 케이티가 처음 호수에 뛰어들던 시간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집에 가야 할 지 모르겠어."
케이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데이브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일 내가 가르쳐 줄게." 그가 말했다.
"내일?"
"일찍 떠나면 돼."
"내가 어디서 사는지 알아?"
"물론이지."
"난 오늘 밤에 떠나야해."
"금방 밤이야. 밤엔 걸어갈 수 없어. 자, 가자!"
그가 일어났다. 드디어 두 손이 나타났다. 그의 나이에 맞지 않게 조금 큰 손이었다.
작은 소년의 큰 손.
케이티는 소년을 따라 호숫가를 걸었다.
"어디 가게?"
"우리 집."
그들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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