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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오글거린다는 말
글쓴이 김수현
" 저 망령같은 죽음의 신마저 반해서 그대를 이 어둠 속에서 지키고 사랑하려는 게 아닐까? 그것이 걱정되어 난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소, "


중학교, 국어 수업 시간. 방학도 다가오고, 기말시험도 끝났겠다. 내가 꽤나 흥미있게, 감동받으며 봤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을 내 학생들도 그런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르치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고 로미오의 대사를 읽고 있던 도중,

" 선생님, 너무 오글거려요! "

평소에도 꽤나 개구쟁이인 한 남학생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아이들이 웃기 시작하며 하나 둘, 그에 반응 하기 시작했다.

" 아, 맞아. 오글거려! 누구 다리미 있는사람? "

" 나 손 좀 펴줘! 손이 오그라든다 ~ "

" 나는 고데기로 펴야겠다. 고데기 필요해! "

세상에, 그 순간 난 그냥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나 유명한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단지 '오글거린다' 라고 표현하다니.
계속해서 오글거린다는 반응,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실망 한 것 일까, 어릴 적, 깊은 감동받았던 내 모습이 떠올려서 일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다른 반에서도 이런 소리가 간간히 들리기는 했다. 하지만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하지 않던가, 오글거린다. 소리를 듣고, 듣다 보니 결국은 댓돌을 뚫어버렸다.
순간적으로 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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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던 것이 었나, 하며 아까 학생들에게 소리 지른, 그 때의 장면이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 오글거린다는 아이들의 수근거림이 내 귀에서 멤돌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내일 학교에서 그 아이들은 어떻게 보나, 앞으로도 소설을 가르칠 때 마다 오글거린다고 하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과 생각이 들었다.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모든게 내 잘 못 같았다.

요즘 아이들은 다 그런걸까, 혹시 그런 소설을 보고 감동받고 감명깊다고 느낀건 나 뿐일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초등학교 4,5 학년이면 인터넷 소설을 한 번 쯤은 접했다고 한다. 나도 알고있다시피, 인터넷 소설은 솔직히 말해 내가 봐도 오글거린다. 하지만 그런 매력에 계속해서 보게 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인터넷 소설은 푹 빠져있으면서도, 정작 중요하게 봐야 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소설은 오글거린다며 기피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하고, 미워지기도 하고,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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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거린다' 요즘들어 굉장히 많이 쓰이고, 더군다나 학생들이 그날 밤에 본 드라마 얘기를 할때도 간간히 들린다. 예를 들면 ' 어제 드라마 주인공, 엄청 오글거리더라! ' 하면서,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하면서 말이다.
오글거린다. 오글거려, 이런 말은 왜 이렇게나 자주 쓰일까. 오글거린다 말고 딱히 표현할 말이 없는걸까?
오글거린다면서, 오글거린다고 기피 하면서 세상은 점점 각막해져간다고 생각이 들었다. 설레이거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 감정을 그저 오글거린다고 표현하는, 계속해서 이렇게 된다면 감정이 굳어지지 않을까, 사라지지 않을까.
한국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늘 무표정에, 감정 표현도 서툴다고들 한다. 더군다나 학생들을 보면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현상이라면, 안그래도 각막한 이 세상이, 더더욱 사막처럼 말라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잠이 들었다.



가뭄으로 메말라 붙어버릴 땅을, 미리 예방 할 수는 없을까,
가뭄으로 메마른 땅을, 해소하는 단비는 언제쯤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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