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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서양과 조선

지은이
강재언,이규수
출판사
학고재
페이지수
262
대상
동양문화권에서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이 서양의 사상과 과학을 수용하는 데서 뒤쳐지고, 그 결과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사상적으로 깊이 다루었다. 미디어 서평 해방 이후 남북한 역사학계 공통의 과제는 조선 식민지화의 원인 찾기였다. 당연히‘조선사회의 정체성 때문에 타율적 근대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이 출발점이 되었다.‘일본의 자본주의 침략으로 조선의 자본주의 맹아가 짓밟힌 데 있다’는 사회경제사적 설명이 비판의 결론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그보다는 ‘西學(서학)의 수용’과 관련한 사상사적 설명이 더 알기 쉬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책은 ▲제1부 ‘漢譯(한역)서양서의 전파-17세기’ ▲제2부 ‘조선의 서학수용과 반발-18세기’ ▲제3부 ‘천주교박해와 서학의 조락-19세기’▲종장 ‘근대화의 기로-일본과의 비교’에서 조선의 서학수용 과정을 중국, 일본의 사정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1784년 이승훈의 북경 세례에서 시작된 조선의 천주교사에 비하면 일본의 천주교사(1594년 기점)는 길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1639년 쇄국령 이후에도 제한적이나마 서양의 종교와 무역을 선별 수용했다는 점이다. 1720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서양 과학서적의 수입, 번역을 해금했다. 그리고 아오키 곤요(靑木昆陽)와 노로 겐조(野呂元丈)에게 蘭學(난학·서양학)을 배우게 하였다. 같은 시기에 李翼(이익)은 東道(동도)와 西器(서기)를 구별하여 동양보다 뛰어난 서기의 수용은 결코 동도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야 실학자의 경세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1811년 양학 연구기관으로 天文方(천문방)안에 蕃書和解御用(번서화해어용)을 두었는데 그것이 1863년에는 양학 수용을 통한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 된 開成所(개성소)로 발전되었다. 조선의 비극은 같은 시기인 1801년 신유교난에서부터 시작해서 反西敎(반서교)에서 반서양으로 전환하여 아시아 최후의 `隱者(은자)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에도 서학 수용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이후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신부 아담 샬을 통해 서학을 접하고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1644년 그가 귀국 2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서학의 수용은 불발에 그쳤다. 한편,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표류를 계기로 이들을 통해 서양의 천문학, 역법, 대포 제조 등에 관한 기술 습득에 힘썼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1601년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들어온 이후 중국은 1720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서학 수용의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中體西用(중체서용) 중 고급한‘중체’의 학문은 중국인 사족에게, 저급한‘서용’의 학문은 고용한 외국인에게 맡긴다는 중화사상이 서학의 중국 정착을 방해했다. 조선, 중국, 일본에서 서학 수용의 양상은 서로 달랐고 그것이 서로 다른 근대화의 길을 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강재언 교수의 결론이다. <문화일보 98/01/22 方大秀기자>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남북한 역사학계의 공통 화두는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되어야 했는가」하는 것이었다. 전근대에는 대등한 교린국이었던 조선과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전자는 식민지로 전락한 반면,후자는 아시아의 제국주의로 발전한 분기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양과 조선­그 이문화 격투의 역사> 는 조선 좌절을 낳은 원인을 사상적으로 조망한 역사 교양서이다. 저자 강재언씨 (72)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역사학자로 민족차별에 굴함 없이 조선 근현대사 연구분야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신편 한국 근현대사 연구> (한울 펴냄), <조선의 서학사> (민음사 펴냄), <한국근대사> (한울 펴냄), <한국근대사 연구> (청아출판사 펴냄),<한국의 근대사상> (한길사 펴냄) 등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94년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펴낸 것을 번역­출간한 것으로 17∼19세기 변혁기에 조선이 서양의 과학 (서학) 과 종교 (서교)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또 그것이 중국과 일본의 서양문물 수용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민족의 이익을 위해 서양의 과학과 사상, 문물을 올바로 수용할 책임이 있었던 조선 엘리트층의 대응과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어려운 시기를 헤쳐가기 위한 실사구시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양 여러나라 중 일본이 최초로 문호를 개방한 나라는 미국으로 미­일친화조약이 체결된 것은 1854년 3월 3일, 통상조약 및 무역장정이 맺어진 것은 1858년 6월19일이다. 이에 반해 조선이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1876년 2월26일, 조규 부록 및 무역규칙 (강화도조약)을 조인한 것은 같은해 8월 24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비해 문호개방 시기는 22년, 통상조약은 18년이나 앞선 셈이다. 하지만 조선이 1882년에야 겨우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을 감안하면 일본과는 실로 28년이란 시간차가 있는 것이다. 조약 체결과정에 있어서도 일본은 미국과 애매하고 복잡한 교섭과정을 4년이나 끌면서 자기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끈질기게 버텼으나 조선은 논의다운 논의 한번 없이 바로 조인하고 말았다. 근대적 의미의 화친 또는 수호조약의 중심과제는 「통상」문제였으나 조선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저자는 일본과 조선이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된 것은 서학을 수용하는 방법이 판이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일본은 1720년 도쿠가와 요시무네 (덕천길종) 장군이 기독교와 과학을 분리해 서양서 중에서 과학서 수입을 허용하는 등 서양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은 1801년 시작된 천주교 탄압의 와중에 반서교에서 반서양으로 전환하고 「쇄국양이」의 틀에 박혀 아시아 최후의 은자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설 명이다. 조선은 1882년 미국이란 서양세계에 문호를 개방했으나 이미 일본과의 국력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세계일보 98/01/16 염호상 기자>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오늘의 IMF 상황을 18∼19세기적 서세동점 상황에 오버랩시켜 보면 어떨까. 캉드쉬 총재는 지난 3세기 동안 한국 근대사를 간단없이 유린해온 서세의 현존하는 실체다. 그럼 도도하게 밀려드는 서양물결의 본질을 포착못하고, 합리적 수용을 거부했던 조선조의 완몽한 지식인에 해당하는 것은 지금 무엇인가.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하나조노대학 교수)씨의 최신 저서 <서양과 조선-그 이문화 격투의 역사>는 이같은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단순한 흥미로만 끝날 수 없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무시할 수 없는 유사성 때문이다. 강씨는 고국의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속에서도 지적 수준이 높은 우리나라가 서양의 사상과 과학을 수용하는 데 왜 뒤떨어져 외국의 수모를 당하는 낙후한 나라로, 심지어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를 밝혀 `감고계금` 하자는 것"이라고 저술의도를 밝히고 있다. 강씨는 이 책에서 17세기 이후 서양과 조선의 도전과 응전, 침투와 수용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 있다. 마테오리치, 아담샬 등 서양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서교와 서학사상이 처음 전래됐을 때만해도 이수광, 이익,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 조선 지식인들은 반서교 입장은 취했을지언정, 서학의 과학성과 근대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801년 신유교난을 겪으면서 반서교는 반서학으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반서양으로 나아가 개국 직전에는 마침내 "서양과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는 척화비 사상에 까지 이르게 됐다. 강씨는 "결국 1882년(조-미수호통상조약) 양이에게 처음 문호를 개방했으나, 이 역시 `서학 부재`의 개국이었다"고 개탄한다. 그 결과는 익히 알려진바다. 강씨는 "한국과 일본의 서학 수용의 시간차가 양국 근대화의 명암을 갈랐다"고 단언한다. 물론 수용태도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서세동점의 핵심이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한 통상에 있다는 걸 간파하지 못했다. 일본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까지 4년이나 되는 교섭과정을 끈질기게 버티며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킨 반면 조선은 논의다운 논의도 없이 곧바로 조인하고 말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모든 사태의 근본원인은 강씨에 따르면 `조선 유학의 사상적 한계`였다. 이 `한계`가 지금 우리 주변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 그의 `감고계금`이 주는 메시지다. <조선일보 김태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