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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3

지은이
유홍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페이지수
350
대상
우리 국토는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뿐 별다른 의미를 못 느끼는 유적들을 꼼꼼히 답사하면서 저자는 진주를 캐내듯 산하에 스민 역사의 자취와 누대의 숨결을 발굴하여,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풀어놓는다. 종횡으로 얽히고 설킨 유적의 신비를 뒤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듯 명료하게 해설해가는 이 답사기는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문화창조라 할 만하다 미디어 서평 문필가는 ‘학삐리’(학필)와 ‘딴따라’두 유형이 있다.이런점에서 유홍준은 ‘딴따라’에 가깝다.그러나 이 글쟁이의 이야기가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문학평론가 백낙청(서울대·영문학)교수가 사석에서 밝힌 ‘유 홍준론’이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영남대·미술사)교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두 권으로 온 나라에 문화유산 붐을 일으켰다. 강원도 철원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그의 책을 길잡이 삼아 답사길에 올랐던 독자도 부지기수.유교수가 3년여의 공백을 깨고 답사기 시리즈 제3권(창작과비평사간)을 펴냈다.부제는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시사월간 ‘WIN’에 10개월간 연재됐던 글도 포함됐다. 유교수는 “1권이 문화유산에 대한 흥미와 재미를 갖게 하는데 중점을 둔 반면,2권은 깊이 있는 해석에 무게가 실려 다소 읽는 맛은 떨어졌다”며 “3권은 문화의 생산자.소비자로서 곳곳에 묻어 있는 인간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집필의도를 밝혔다. 예 전과 변별되는 글쓰기에 상당히 고심했다는 것.3권에 주로 담은 내용은 공주·부여 등의 백제문화,불국사로 대표되는 신라문화,안동의 양반문화,섬진강·지리산변의 산사문화.4가지를 선정한 이유를 묻자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나중에 쓰려고 일부러 남겨 놓았던 것들”이라고 답했다. 백제·신라·양반·산사의 미학에 대해 그가 내린 정의는 우리 고유 문화의 가치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특히 백제문화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단어 찾기가 고민이었다고.해답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않다’(검이부누 화이부치)에서 찾았다.그리고 공주의 옛이름이 유래한 금강변 곰나루 이야기며 햇빛 방향에 따라 미소가 바뀌는 서산 마애삼존불상 등을 통해 백제의 고졸미를 맛깔스런 입심으로 풀어낸다. 신라문화의 결집체는 불국사.가람 배치부터 뒷간 용도로 사용됐던 석물까지 구석구석을 훑었다.“불국사는 성과 속이 융화되고 인공과 자연이 만난 조화적 이상미의 표본”이라고 제시한다. 전통문화가 ‘기적적으로’보존된 북부 경북·안동 지방의 양반문화도 그가 꼽은 값진 유산.안동 봉정사·영주 부석사를 비롯해 차전놀이·하회탈춤·놋다리밟기 등 놀이문화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자연의 생김새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지리산 산자락의 구례 연곡사도 찾았다.유교수는 “답사기 3권을 마무리한 감회를 말해 달라”고 하자“소비·향락으로 흐르던 놀이문화를 배우고 즐기는 문화관광으로 돌린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답했다. 사실 그의 답사기로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 행태가 바뀐 적도 있었다.지난해 서울중동고는 신라·백제·남도 문화권으로 나뉘어 답사를 떠나기도 했다.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해 미술사적 시각뿐 아니라 국문학·한문학·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급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관 련서들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유교수는 이번에 언급되지 않은 경기·충북·제주는 물론 일본·만주에 있는 해외유산과 북한의 문화재에 대한 답사도 시도할 생각이다.오는 9월엔 대구 맹인협회와 해인사쪽으로 떠날 예정.“예불과 계곡 소리를 듣고 팔만대장경을 손수 만져보는 경험이 될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중앙일보 97/07/11 홍수현 기자>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47.영남대.미술사학)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비평사간)는 출간직후 서점가에서 큰 타박을 받았다. 좋은 제목이 많이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딱딱한 「답사기」 제목에 「나의」라는 당돌한 수식어를 붙였느냐는 항의 아닌항의(?)였다. 그러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서점가의 예 상을 깨고 날개돋친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출간 2개월만에 10만부를 돌파했고,출간된지 3년여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서점가의 우려를 비웃기나 하듯 총 1백5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인문교양의 부동의 베스트셀러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소설이나 에세이류가 아닌 순수한 인문 교양도서가 1백만부를 넘어선 것은 한국 출판사상 초유의 일로,「…문화유산답사기」는 우리 출판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국토여행의 「길눈이」(안내자)를 자청한 유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우리 국토에 잠들어 있는 각종 문화재에 생명의 숨결을 부여,「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다」는 그의 주장을 실감케 했다.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미술사 등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는 씨줄과 날줄로 옷감을 짜고(답사여행),거기에다 정교한 무늬를 넣은(문화재 해설),아름다운 비단옷(문화유산 답사기)을 선보였다. 이 때문에 문학평론가 백낙청 교수의 말처럼 「입심 좋고 글솜씨 좋고 먹성 좋고 눈썰미 사나운」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국토와 문화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됐다.「…문화유산답사기」의 성공은 다른 모든 베스트셀러가 그러하 듯 책 출간시점이 사회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몰락이후 문화마인드를 갖춘 실용서의 출간을 고대하는 독자들의 다양한 욕구가 분출되는 시점이었고,오너드라이버의 증가로 여행붐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뿐만아니라 특유의 입심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구수한 그의 슬라이드강의는 책 출간후 이틀에 한번꼴로(1백60여회) 독자를 찾아감으로써 답사기의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게 출판사측의 분석이다. 그러나 유교수의 답사기는 무엇보다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들의 전문용어 없이 지식과 감성을 전달하는데 성공한 그의 문체에 돌려야 할 것 같다. 특히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 사랑을 가져달라고 하소연한 「남도답사 일번지」(1권)의 성공에 머물지 않고 그는 그보다 한차원을 높인,예컨대 구체적으로 문화유산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드러낸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2권)를 독자들에게 잇따라 선사했다. 막연한 독자를 좇았던 1권과는 달리 뚜렷한 독자층을 겨냥한 2권으로 내용의 차별성을 가한 점도 성공요인중의 하나로 꼽힌다.그리고 독자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오류의 지적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수정­보완한뒤 2권에 자세히 주석을 단 점도 책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었다. 유교수는 현재 집필에 들어간 제3권 「회상의 백제행」도 2권보다 수준을 한차원 높여 미학중심의 답사기로 남한지역 답사여행을 마무리지을 계획이다. 말하자면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 그대로 지리산 자락 절(사)의 문화와 영주­안동일대의 고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의 미학에 대해 강의할 것 이란 설명이다. 한편 「…문화유산답사기」는 최근 Quick Time VR기법을 도입해 이용자가 현장에 가지 않고도 답사지의 주위경관과 세부적인 곳을 임의로 선택해 둘러볼 수 있는,가상 현장답사가 가능한 「CD­ROM」으로 출반돼 나왔다. 한겨레정보통신이 개발한 이 CD­ROM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책이 갖는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입체적으로 잘 살려내 특히 눈길을 끈다.<세계일보 96/09/19 노정용 기자> 문제의식은 탁월, 비판은 공정했다 어떤 책이 1백만권 이상 팔려나가면 그것은 이미 출판의 영역을 넘어선다. 일단1백만권의 책이「발언」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거대한「담론」이며 「권력」의 속성마저 띤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인문사회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1백만권 이상이 나갔다. 이번에 3권을 펴낸 창작과비평사는 어림짐작이지만, 1권이 1백만권 이상 팔렸고「일부러 어렵게 쓴」 2권은 60만권 정도 나갔다고 한다. 저자 유홍준씨(48·영남대교수).「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의 말은 90년대 우리 사회의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글은 올해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윌출산과 남도의 봄」. 문화재와 귄력의 관계를 가차없이 파헤쳐 온, 그리고 「운동권」의 논리와 정서로 평판되는 그의 글이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에 대한, 그의 책에 대한 찬사는 넘치고 또 넘친다.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높였다면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 땅의 면적을 열배쫌 확장시켰다」「유홍준이 있기 전에 이 땅에는 현재적 의미의 문화유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등등.「문화재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탁월했지만 비판의 칼이 과연 공정했느냐」는 반론도 거셌다. 그러나 저자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미술사가들로부터 단 한번도 전문적인 반론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가 박정희정권 시절「문무대왕 해중릉」조사 및 무령왕릉 발굴을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란. 그는 1권에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처(散處)라며 당시·조사단의 수중릉발표를 「최고 권력자의 정치수요에 편승한 사기극」이라고 몰아쳤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왕암이 유골을 묻은 장처(葬處)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것이 산처냐, 장처냐는 문제는 아직 학계의 정설이 없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섣부른 예단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반면에 그는 우리 문화재 발굴 사상 최악의 원형파괴 사례로 꼽히는, 당시 김원롱 국립박물관장(93년 작고)의 과오에 대해서는 시종 감싸안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몇달 몇년을 두고 진행돼야 할 발굴이 말 그대로「권력의 수요」에 따라 단 이틀만에 끝나버린 것에 대해 「당시 고고학계의 한계」「잘못을 지적할 원로가 없어서」운운하며 애매하게 얼버무린 것. 이외에도 그의 답사기에 대해 「이의」 이상의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어쩌면 이는 그의 말대로, 상당 부분 「스타에게 쓸리는 엄청난 질시」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의 학문과 감식안도 한 시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도,「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유홍준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문화권력」으로 전락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동아일보 97/7/15 이기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