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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은이
조세희
출판사
이성과 힘
페이지수
351
대상
'난장이' 는 안락한 일상 속에 잠자온 우리에게 가열한 충격이다. 그는 그 왜소하고 병신스런 모습을통해 광포한 산업시대에 접어든우리 사회의 허구와 병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꿈과 자유에의 열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진정성의 가치를발견한다. '이 가치야말로 추악한 현실에 도전하는 상상력의 힘이며,조세희의 문학에 대한 우리의 감동과 정신의 고양은 이로부터 비롯한다. 그의 고통에의 조갈,절망에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이곳의 삶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상상력의 전율적인 대결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김병익/문학평론가> 조세희의 <난장이‥‥>는 대단히 비극적인 우리 시대의 소외된 신화이자,동시에 소외 초극의지의 신화이다. 현실주의적 전망이 닫혀 있던 시대, 아니 절망을 차지하고라도 현실 인식마저 미망에 휘둘려야했던 시절,조세희는 이처럼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거인'과 난장이'의 대립적 경계를해체한 초극의 지평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정녕 인간다운 삶과 공간을 꿈꾼 조세희의 소설이야말로,문학의 위의와 영광을 증거하는것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난장이 ‥‥>는 칠십년대 우리네 인문주의와 심미적 이성의 한 절정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 할수 있다.<우찬제/문학평론가> [서평] 독재에 '갇힌 역사' 난쟁이 우화에 비유 소설가 조세희씨는 눌변이다. 그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성과 힘)도 말을 아낀다. 꼼꼼하게 적어가고는 있지만, 쏟아져 나온다는 느낌은 없다. 짜내듯이 써내려간 흔적이 역력하다. 대신 임계점에 이른 문제의식이 곧 터져나올 듯한 긴장감을 준다. 반면 이런 팍팍한 긴장을 푸는 장치가 난쟁이 우화다. 첨예한 비판정신과 난쟁이 우화의 애틋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긴장과 이완의 미학이 소설을 한국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로 만들었다. 조씨는 대표작인 ‘난쏘공’을 제외하고는 37년에 이르는 문단생활에 딱 두권의 책을 펴냈다. 작품집 『시간여행』과 사진집 『침묵의 뿌리』가 있을 뿐이다. 장편소설 ‘하얀저고리’는 쓰기 시작한지 10여년에 이르지만 아직 집필 중이다. 이 작가의 과작과 소설 ‘난쏘공’의 분위기가 전하는 하고싶은 말과 해야할 말 사이의 간극, 그리고 소설가의 사진찍기 등은 모두 ‘눌변’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실제로 그는 ‘난쏘공’을 서울 중구청 앞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서 대부분 썼다. 공공연하게 쓸 수 없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마음대로 써내려갈 수 없는 태생의 이력을 가진 작품들이 눌변의 그늘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70년대의 엄혹했던 사회 분위기를 떠올리면, 산업화의 부작용과 경제적 불평등에 시달리는 도시빈민의 그늘진 삶을 다룬 이 작가가 압박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점을 21세기 독자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10년여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다가, ‘난쏘공’연작을 쓰기 시작하면서 잠시 ‘말문’을 열었다. ‘난쏘공’ 연작은 75년 ‘문학사상’12월호에 단편 ‘칼날’이 실리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본격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그 유명한 ‘굴뚝청소한 두 아이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단편 ‘뫼비우스의 띠’부터. 76년 ‘세대’지 2월호에 실린 ‘뫼비우스의 띠’는 당시 계간문예지 ‘문학과지성’이 시도하고 있던 재수록시리즈(‘문학과 지성’ 76년 겨울호)에 게재되면서 문단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첫작품이 발표된지 27년에 이르도록 ‘난쏘공’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작가는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즉 70년대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기보다 내면화되고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난쟁이 일가의 삶을 등장시킨 우화형식도 작품의 긴 생명력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당시 유신정권의 폭압적인 검열을 피해가기 위해 차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우화형식이, 도리어 문학성을 고조시키고 21세기의 독자들도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이다.<문화일보 02/06/18 배문성 기자> '난쏘공' 24년만에 150쇄 쏘아올리다 1978년 처음 출간된 조세희씨(60)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힘)이 출간 24년만에 통산 150쇄를 기록했다. 근대화에 희생된 소외계층의 문제를 파헤친 이 소설은 흔히 ‘난쏘공’으로 줄여 불리며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특히 ‘난쏘공’은 그동안 흐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우리 문학사상 124쇄라는 대기록을 세운 후 작가의 장남 중협씨가 대표로 있는 도서출판 이성과 힘으로 출판사를 옮겨 이번에 또하나의 금자탑을 쌓았다. 출판사측에 따르면 ‘난쏘공’은 지난 96년 100쇄를 돌파한데 이어 지금까지 150쇄 60만5500부가 팔렸다. 독자층도 처음에는 대학가 운동권의 필독서로 읽히다가 몇년전부터는 중고등학생의 권장도서로 확대되면서 20년이 훨씬 지난 요즘에도 매년 2∼3만부씩 꾸준히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문학사상’ 12월호에 ‘칼날’이 발표되면서 시작된 ‘난장이’들의 행진은 ‘뫼비우스의 띠’(1976년 ‘세대’ 2월호), ‘우주여행’(1976년 ‘뿌리깊은 나무’ 9월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 ‘은강 노동가족의 생계비’(1977년 ‘문학사상’ 10월호)를 거쳐 197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로 마무리 됐다. 12편의 연작 단편은 그해 6월5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표제로 삼은 단행본으로 한데 묶여 나왔다. 소설 ‘난쏘공’은 지난 70년대 고도 성장의 신화를 창출한 한국 사회의 음지를 향해 쏘아올린 조명탄이었다. 공장 노동자 가족의 일상을 그린 이 소설에는 부의 분배에서 밀려나 인간적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한 소외 계층의 지난한 삶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작가는 난장이 일가로 상징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때로는 우화적으로, 때로는 지성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지난 70년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열악한 우리 노동현실과 소외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난장이의 왜소하고 어눌한 모습을 통해 당시 광폭한 산업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의 허구와 병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문장과 감수성으로 진한 감동을 주는 것도 이 소설을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히게 한 이유로 꼽힌다. 한편 작가는 지난 80년대초 신문과 월간지에 연재했다가 중단했던 전작 장편 ‘하얀 저고리’를 조만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이 작품은 120세까지 죽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한국 현대사가 갖는 고난의 뿌리를 조명하고 있는데,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자행된 ‘광주학살’이후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민주화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까지 서술하게 된다. 조씨는 “‘하얀 저고리’는 ‘난쏘공’에서 못다한 말을 쓴 작품이 될 것입니다. 80년대 사회에 대한 강한 절규를 담을 예정입니다”고 말한다.<파이낸셜뉴스 02/06/18 노정용기자> 발간 24년만에 150쇄 '난쏘공'을 아십니까 《1970∼1980년대 ‘한국 대학생과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힘)이 10일로 150쇄를 기록했다. 1978년 처음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판매된 부수는 모두 60만5500부.‘난쏘공’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소설은 1970년대말 화려하게 성장한 도시의 뒷골목에 시선을 고정한다. 작가 조세희(60)씨가 난쟁이 일가를 통해 산업화의 부작용과 경제적 불평등에 떠밀려가는 도시빈민의 그늘진 삶을 간결한 문체로 담아낸 ‘문제작’이다.》 인사동에서 “‘난쏘공’ 150쇄를 맞아 그저 후배(기자)들과 밥 한끼 먹고 싶었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조씨는 “이런 자리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조씨는 한사코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왔다. “문학작품이 24년을 두고 150쇄를 찍어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못난 사람이 나이만 먹는다’고, 150쇄가 절대로 자랑은 아닙니다. 요즘 섹스를 소재로 한 젊은 작가의 소설이 한달에 70∼80만부가 팔리기도 한다지요. 나는 ‘실패한 작가’의 전형이예요.” 둔촌동 그의 집 앞에서 지난달 하순 어느날 아침, 기자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조씨의 자택을 불쑥 찾아갔다. ‘난쏘공’ 150쇄 발간과 그가 ‘작가세계’에 연재했다 91년 중단한 장편 ‘하얀저고리’를 마무리해 출간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취재욕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작품이외의 얘기를 하지 않는 작가가 쉽게 기자를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혹시나’하는 기대를 갖고 달랑 주소 하나 만을 들고 무작정 찾아 나선 것이었다. 70년대풍의 옛 주공아파트 단지에는 5월의 아침햇살이 충만했다.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린지 두어시간. 인쇄물로만 접했던 그가 불쑥 모퉁이를 돌아나왔다. 어렵게 전화통화가 된 그는 기자가 집 앞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외출 차비를 한 듯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려던 길이었어요. 수전증이 와 손으로 글을 쓰기 힘들었는데, 지인(知人)이 노트북을 가져와 요즘은 이것으로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난쏘공이 150쇄가 되는 6월에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장편 ‘하얀저고리’는 출판사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언제 나올 것인지 정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는 “특별히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며 이어지는 질문을 잘랐다. 기자를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던 그는 “미안해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고 중간에 잠시 차를 멈추더니 슈퍼마켓에 들러 과일주스를 사왔다. “요즘 누가 ‘조세희’를 알겠어요. 그런데 가끔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휙 지나갔던 젊은 학생이 다시 돌아와 ‘혹시 난쏘공의 조세희씨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럼, ‘너희 부모세대가 읽었던 책인데 기억하느냐’고 하지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 ‘따뜻함’과 ‘슬픔’이, 교집합을 나타내는 벤다이어그램처럼 겹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기자에게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그의 모습이 그 후로도 한참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인사동에서 “‘난쏘공’의 150쇄는 조세희의 절규에 대해 받은 일종의 ‘동의’ 같습니다.” 진실한 ‘절규’를 모았을 때 ‘역사’가 된다는 설명. 그는 작가가 될 때 “3000장 이상 쓰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3000장이면 작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털어 넣을 수 있어요. 그렇지 못하다면, 서툴거나 다른 욕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쏘공’이 1300장이었거든요. 3000장의 나머지가 장편 ‘하얀저고리’지요. ‘하얀저고리’는 또 다른 절규입니다. ‘난쏘공’에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았는데, 현대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세계사가 출간을 준비중인 ‘하얀저고리’는 조선조 후기 농민반란을 이끈 노비 섣달쇠와 그 부인 아침이의 이야기가 한 축을, 그 후손으로 80년 5월 광주항쟁에 적극 참여한 영희네 가족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같은 선상에 배열된 이 두 이야기는 맞닿아, 소수의 기득권층이 힘없는 다수의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한다는 ‘역사적 일관성’을 보여준다. “구로동에 강의를 간 적이 있어요. 강의가 끝난 뒤 핏기없는 어느 여자애가, 오래 갖고 있어 시든 꽃과 손에 꼭 쥐고 있어 온기가 가시지 않은 십자가를 제 손에 쥐어 주었죠. 제가 쓰는 글은 이 아이와의 약속이예요. ‘왜 이런 현실을 보고, 가만히 계세요. 글을 써주세요’라고 얘기하는 노동자와의 약속이예요.” 그러나 ‘하얀저고리’ 연재를 중단한 뒤 그는 10년이 넘도록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이유는 “남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스스로 ‘가슴 찡하고, 따뜻한 세상 이야기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책을 낼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마치 ‘문학적 유언’처럼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내 아들에게 전화 한통만 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고 한 마디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습니다”라며 빙긋이 웃었다.<동아일보 02/06/15 조이영 기자> "이젠 젊은세대에 희망을 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힘)의 작가 조세희(60)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문단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끌어낸 명분은 ‘난쏘공’ 150쇄 돌파. 1978년 6월5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을 찍은 이 12편짜리 연작소설집은 지식인의 필독서로 자리잡으며 지난 10일 만24년 만에 150쇄(총 60만5천5백부 판매)를 기록했다. 이 일을 계기로 계간 ‘작가세계’는 가을호에 김우창 고려대 교수(영문학), 김병익 인하대 석좌교수(국문학) 등이 참여하는 조세희 특집을 마련해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그런데 ‘난쏘공’의 성공담보다 더욱 궁금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 20년 넘게 써오고 있는 또 다른 소설 ‘하얀 저고리’(세계사 출간예정)의 존재다. 아름답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난쏘공’은 평생 문학에 정진해온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난쏘공’이 쇄를 거듭하는 동안 조세희는 세간에서 기대하는 후속작을 선뜻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왜 그리 오랜 세월 산고를 겪고 있는가. 올 8월 환갑을 맞는 그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자신의 문학인생을 털어놓았다. ▲‘난쏘공’의 탄생 난 1965년 문단에 나왔으나(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곧 작가가 되기를 포기했다. 좋은 작품을 쓸 자신이 없었다. 작가가 아닌 30대 일반 직장인이 되어 70년대를 살았다. 우리에게 70년대는 파괴와 거짓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다. 전 인류의 절반이 경험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우리는 같은 동족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나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는 없나 생각했고, 내 경우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감을 찾기 위해 취재를 다니다가 재개발지역 동네에서 난장이 가족을 만났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철거 날짜가 다가오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고깃감을 끊어다가 밥상을 차려서 마주 앉았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철퇴에 맞은 벽이 뻥 뚫리면서 무너져버렸다. 그때까지 직장인이던 나는 작은 수첩 하나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정희, 김종필 등 1세대 쿠데타 군인들의 독재가 없었다면 ‘난쏘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소설 속 주인공인 난장이 일가에 늘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항상 내 옆에서 허리를 쿡쿡 찔러대며 어서 일어나 일하라고 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150쇄를 찍으면서 60만5천5백부를 팔았다는 것은 자랑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한 일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몇달간 컴퓨터 앞에서 섹스 이야기를 써서 순식간에 1백만부를 팔기도 한다. 그래도 난 이 작품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다. 얼굴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여성노동자가 시든 장미를 쥐어준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메리칸 뷰티’보다 훨씬 고귀한 꽃이었다. ▲주저하는 ‘하얀 저고리’ 독재자를 만난데 따른 진정한 비극은 전 국민이 그들의 수준에 맞춰 천박해지는 데 있다. 누구 할 것 없이 더러운 손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80년대는 그런 연대였다. 난 광주의 참상에 마음의 빚을 느꼈고 유신체제에 입이 막혀 ‘난쏘공’에서 하지 못한 말을 ‘하얀 저고리’에서 쓰고 싶었다. 당시 나는 작가란 평생 3,000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하면 작가가 아니고 그 이상이면 쓸데없이 늘렸다고 느꼈다. 내게는 ‘난쏘공’을 제외한 1,600장이 남아있었다. ‘하얀 저고리’는 기본적으로 혁명담이다. 120살을 넘겨 죽음을 목전에 둔 아침이(조선의 상징)란 할머니가 과거와 현재의 투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을 위해 전국을 떠돌던 80년대 초반, 전남 담양에서 하루를 묶었는데 밤새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할머니는 “산 사람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니 죽은 사람들이 죽창을 준비해주는 소리”라고 전했다. 95년 프랑스 총파업에 동참했을 때 빗자루를 탄 사람들이 그려진 깃발을 보았다. 역시 같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얀 저고리’의 첫 장면은 남루하고 멍들고 피흘리는 원혼들이 연희동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 마지막은 할머니가 미래세대에 희망을 걸고 고난에 찬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누구는 이 작품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빗대기도 했다. 일찌감치 완성된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건 최소한 남을 속이지 않겠다는 생각과 전적으로 나의 무능력 때문이다. 스스로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작품이 어떻게 남들을 감동시키겠는가. 80년대에는 현실에 비해 언어가 가벼워 계속 부서져나갔고 90년대에는 세상이 간교하게 바뀌면서 부적절한 언어가 돼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가방 속에 원고가 있다. 어쨌든 이것은 조세희 밖에 쓸 수 없는 작품이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작품이 완성되면 기분좋게 술 한잔 할 것이다. ▲시대와의 불화 내가 작가가 안됐다면 젊음을 다 잃어버린 나이까지 여전히 동시대인 상당수와 불화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유대인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40년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다. 노예근성이 밴 기성세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난 젊은 세대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70~80년대 누구보다 앞장서서 독재에 항거하고 감옥에 갔던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 돼버렸다. 일제부터 누적된 굴욕의 역사와 IMF라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난쟁이에 머물러 있다. 컴퓨터 키로 이동하는 자본과 세계화라는 상황논리 속에서 절규하는 이들은 노동판의 극렬분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구하는 우리의 이웃들이다.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해고당해 고통받는 그들을 보면서 아직도 나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물론 문학은 폭넓은 것이다. 내 생각이 이제 극소수파가 돼서 들어주고 인정해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직도 죽은 나무 위에 씌어진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해놓은 일이 부끄럽다. 나는 지금 송장으로 나와서 뼈로 말하는 것이다.<경향신문 02/06/14 한윤정 기자> “지금도 '난쟁이'세상… 문학이 할일 많다” 어느 날 조세희씨는 재개발지역의 세입자 가족과 그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밥을 먹는데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철거반과 싸우다 돌아오면서 조씨는 노트를 샀다. 그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 노트에 씌어지기 시작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50쇄를 돌파했다. 13일 서울 인사동의 음식점에서 만난 조세희씨는 “환갑을 맞은 내게 의미있는 소식”이라고 말했다. ‘난쏘공’으로 알려진 이 소설은 그가 1965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10년의 침묵 끝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1970년대 후반 도시 노동자 난쟁이 가족의 고된 삶을 그린 이 소설에서 멸시에 지친 난쟁이 아버지는 집이 철거되자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큰아들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기득권의 높은 벽에 좌절하고 기업주를 살해, 처형되고 만다. 산업화의 시대에 소외된 도시 빈민층은 조씨에게 모두 ‘난쟁이’였다. 출판사를 다니던 그는 서울 한복판 고층 사무실에서 창 밖을 내다봤다. “한국이 보였다.”재벌의 횡포, 성장제일주의, 부동산 투기. “글쓰는 것을 포기했던 나는 ‘일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1975년 ‘문학사상’에 첫선을 보였던 ‘난쏘공’ 연작은 78년 6월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까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예중앙’은 물론 대학신문에까지 실렸다. 70, 80년대 젊은이들은 이 책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에 눈뜨곤 했다. ‘난쏘공’ 후 조씨는 다시 침묵했다. 가혹한 체제에게 빼앗긴 문학의 언어를 찾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그는 발전노조 대우자동차 노조 등 노동운동 현장을 찾았다. ‘난쏘공’에서 그렸던 민중의 열망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구로공단에서 만난 한 소녀가 그에게 선물을 주었다. 시든 꽃 한 송이와 따뜻한 쇳덩어리. 집회에서 만난 한 학생이 “제발 글을 써 주십시오”라면서 조씨의 두 손을 잡았다. 그렇건만 조씨의 문학행보는 지금도 더디다. 87년 ‘월간중앙’에 연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하얀 저고리’를 8월에나 세상에 내보낼 계획이다. 121세 아침이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인 ‘하얀 저고리’는 맞아서 피 흘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떠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80년 5월에 죽은 사람들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작품 자료를 수집하던 중 전해 오는 얘기를 들었다. ‘산 자들이 싸우지 않으면 죽은 자들이 싸우러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하얀 저고리’는 그 죽은 자들의 통곡이고 싸움이라고 조씨는 말한다. 조씨는 문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평생 원고지 3,000매 이상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작가가 능력을 모두 발휘해 넣을 수 있는 분량은 이 정도라고 그는 생각한다. ‘난쏘공’은 1,400매, 나머지는 ‘하얀 저고리’에 담을 것이라고 조씨는 말한다.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떴지만 그는 축구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TV가 없어 축구를 볼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축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붉은 악마 응원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붉은 색은 결코 죽지 않는 색이다. 내 작품의 주인공도 ‘붉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난쏘공’은 2000년 이성과힘 출판사로 판권을 옮겼으며 지금까지 모두 60만5,500부가 팔렸다. 조씨는 이 시대가 여전한 난쟁이의 세상이라고 믿는다. “난쟁이의 세상에서 문학이 지켜나가야 할 자존심과 명예가 있다. 이 세상에서 문학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한국일보 02/06/14 김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