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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장마

지은이
윤흥길
출판사
민음사
페이지수
397
대상
읽기에 편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읽는데 고통스러운 것이 있고, 읽고난 후 책장을 마저 덮기가 어려운 작품이 있는가 하면 첫 장을 펼치는 순간 그것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윤흥길의 소설은 정감이 너울댄다. 하다못해 이름없고 힘없는 대상도 그를 만나면 그 순간부터 주인공이 되버리는 것이다. 그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정도껏 뒤틀려 있고 작가는 그것을 탁월한 묘사의 힘과 토속적인 주술을 덧붙여 이야기를 부려 놓는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윤흥길의 대표적인 단편들을 엮은 것이다. 한 편 한 편 그가 드러내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아마도 그 책을 펼쳐놓은 순간 만큼은, 독자는 피란의 뒤안길에 서 있게 될 것이며 한 시골의 둑길을 걷는 중일 수도 있을 게다. [평론] 한국 사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도 지적인 작가, 관조적 묘사력을 발휘하면서 실험가의 면모를 가진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서 강렬하게 호소해 오는 것은 토착적인 한(恨)이다. 그 토착적인 한은 『장마』에서 묘사되는 한국인의 근원적 정서뿐 아니라, 그것이 6.25 또는 분단의 현실적 비극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그 역사성에 의해 높이 평가된다.<김병익/ 문학평론가> [독자서평] 전쟁, 문학, 그리고 사람들... 한국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며 서양의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이데올로기가 맞붙은 대리전이었다. 경직된 정치 이념의 체계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한반도에 전쟁이란 재앙을 불러왔고,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고 고통받아야 했다.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도 한반도는 허리를 잘린 채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파행과 질곡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현대 소설사를 톺아보면,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 수없이 쓰여져 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소설을 가리켜 6·25소설, 분단소설, 전쟁소설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문학에서 '사랑'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전쟁'이다. 전쟁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소설가 황석영은 말한다. '저는 전쟁에서 문학의 역할이 진도 '씻김굿'의 굿 중 극인 '다시래기'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광대극인 다시래기는 일종의 위무나 구원하는 역할을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상주에게 우스갯소리와 음담패설로 웃겨 카타르시스를 얻게 하는 것이 다시래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까닭이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중략)-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장마』를 관통하는 특징적 인상 혹은 전체적으로 압도하는 지배적 정서는 '장마'라는 기후현상이다. 소설의 배경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따라 배경의 묘사가 환기하는 지배적인 정서의 양상이 달라진다. 작가는 전쟁을 장마와 연결함으로써 배경의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구름과 언제 그칠지 모른 채 계속해서 비를 내리는 길고 지루한 장마는 음울하고 불안한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암시하면서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장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한 집안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했던 집안은 전쟁으로 모든 게 변한다. 한반도 전체를 장악한 이념의 대립은 가족의 내부까지 침투해 들어와 갈등을 일으킨다. 빨치산인 삼촌과 국군 소대장인 외삼촌으로 인해 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에 생겨난 미묘한 갈등은 외삼촌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날 이후 '외할머니의 장마비 속의 저주'와 함께 더욱더 노골적으로 고조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불화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다. 단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말다툼 한번 없이 의좋게 지내왔던 사돈' 관계를 갈라놓는다. 할머니들은 빨치산 삼촌과 전사한 외삼촌의 불행이 상대방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의 갈등을 소년이 바라본다. 단, 소년은 인식의 주체자인 초점화자이지만, 이야기의 서술자인 화자는 아니다. 사건을 경험하는 건 소년이지만, 사건을 판단하며 이야기하는 건 어른이 된 소년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이 같은 '이중의 시각'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순진한 눈을 통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비극의 체험을 조명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다. 소년은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팽팽한 갈등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선택의 심리적 갈등을 벌인다. 외할머니는 손자가 자기편이 되기를 강요하지만, 소년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도 쉽사리 기울지 않는다. 그 즈음, 소년은 이런 갈등-크게 보아서는 이념의 대립-이 야기하는 무서움을 깨닫는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소년은 삼촌을 잡으려는 '맥고자를 눌러쓴 사내'에게 속임을 당하고, 할머니에게 노여움을 산다. 우리는 소년의 경험을 통해 전쟁은 사람들을 가르고 서로에게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거짓과 속임수의 세상을 만드는 비정상의 세계임을 깨닫는다.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과 소년과 할머니의 갈등은 구렁이의 출현으로 해소되며 사건의 흐름이 반전된다. '저주를 받은 사람이 죽으면 구렁이로 변한다.'는 무속신앙의 소재를 이용하여 전쟁이 끼친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의 통로가 되는 희망을 던지며 소설은 끝맺음을 한다. 장마가 그친 날 저녁,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에 쫓겨 꼬리가 거의 잘린 구렁이 한 마리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자신의 저주로 사돈 총각이 구렁이로 변했다고 생각한 외할머니는 위로와 극진한 대접으로 구렁이를 떠나보낸다. 할머니는 외할머니의 행동에 고마움을 전하며 그 동안 잃었던 친밀한 유대감을 다시금 되찾고, 할머니는 임종하기 전 소년을 용서한다. 할머니들의 소박한 신앙과 모성애가 어긋났던 둘의 관계를 화해로 전환시킨다는 설정은 아직까지도 정치적 분열과 이념의 갈등으로 전쟁의 불안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반만년간 이어온 단일민족으로서의 고유의 정서가 분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임을 보여준다. 윤흥길은『장마』를 통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정신의 힘은 이데올로기가 만든 물리적인 전쟁의 대립도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해준다. 한반도에 머물러 있는 길고 지루한 장마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에 소설은 우리에게 민족의 화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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