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의 부천시 원미동이라는 구체적 삶의 장소를 무대로 하여,그곳에서 벌어지는 소시민들의 크고,작은 일상사를 따스하고도 날카로우며,섬세하고도 넉넉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는 창작집.
미디어 서평
담담히 그린 `서민들애환`
대체로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만 치열하게 해본 적이 없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필사를 해본 기억도 없거니와 책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여러 번 읽은 책도 드문 것을 보면 지금 `원미동 사람들`을 다시 들쳐보면서 맨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이 책을 두 번 읽었었구나`하는 것이다.
한 번은 호의적인 독자로서, 그리고 두 번째는 소설가 지망생으로서였 다. 내 삶의 모든 기력을 `생활`에만 쏟아부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무거운 비닐봉지들을 내려놓고 계단참에 기대 현기증을 달래고 있거나, 볼펜이 끼워진 가계부를 한숨과 함께 옆으로 밀쳐놓은 뒤 아르바이트 원고 교정을 하고 있거나 하였다. 88년 그 무렵 열에 들떠 뒤척이는 아이의 이마에 밤새워 찬 수건을 갈아놓으며 읽은 책이 `원미동 사람들`이었다.
소설은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으로 떠나는 이삿날로부터 시작된다. 가장은 장롱을 들어낸 자리나 벽의 낙서 따위에서 살아온 흔적을 만진다. 앞으로의 삶의 불안을 누르려는 듯이, `불씨`의 주인공은 뜻밖의 실직으로 성격에 안맞는 외판원이 된 사내. 그는 종일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지하철 차창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본다. 비오는 날이면 일을 쉬고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가리봉동으로 가는 막일꾼은 `그 돈만 받으면 고향으로 가겠다`는 꿈을 토로하며 운다.
그리고 막바지 인생끼리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찻집 여자`에 깃든 쓸쓸함과 애틋함, 똥눌 권리를 찾지 못해 고통받는 `지하생활자`의 생존조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95년,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했다. 이른바 존재론적인 고민속에 있었던 내게는 소설 쓰는 일이 돌파구로 보였다.
그러나 소설작법 같은 것을 배워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몇 권의 책을 골라 꼼꼼히 읽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 `원미동 사람들`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빤히 아는 줄거리를 두 번 읽는데도 여전히 흥미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문체나 묘사의 매력임을 깨달았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인간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면서 작가의 포착력과 시각이 뭔지도 알 것 같았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작가가 조금은 능청스러워야 한다는 것도.
모두가 말하듯이 `원미동 사람들`은 따뜻한 소설이다. 하지만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낙관이나 안이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삶의 비정과 남루를 다보고 알고 있지만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것을 폭로하고 질타하기보다 약간은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독자가)좀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을 만도 하지 않느냐고 바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지적의 타당함을, 지름길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애써 둘러가는 것이 소설의 길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애써 둘러가는 것, 그것은 소설의 길만이 아니다. 거리를 두어가며 지키려는 내 삶에 긴장이 되기도 한다. 다음달이면 사십이 되기 때문인가. 자꾸 서둘러 가려고만 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조선일보 97/12/9 은희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