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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월그
글쓴이 최자인
"아아-"
여기는 어딜까.
"어라, 오랜만이야. 드디어 깨어났네."
옆에는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여자아이가 꽃을 꺾으며 앉아있다.
천천히 일어나보니 가슴 한 곳이 뻥 뚤린듯 허전하였다. 차가운 공기가 스쳐 지나갈 때 마다 가슴이 욱신욱신 거렸다.
주위는 온통 회색에 물들어져 있었다.
하늘도, 나무도, 꽃도, 풀도, 언덕도, 옆에 있는 여자아이도. 그리고 나도 말이다.



"거기 너, 내가 어떻게 이 곳에 왔는지 아니?"
"후훗." 여자아이가 웃었다.
" 뭐가 웃기냐."
" 너답다 해야될지 어이가 없다 해야될지. 있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 어딘지 아니?" 라던가, "넌 정체가 뭐야!" 이런 식으로 물어야 되는거 아냐? 후훗. "
"이 질문의 답을 받은 다음에 곧바로 물을려고 했었어."
"후훗. 그래. 그렇구나. 응. 후훗."
그 여자아이의 말이 맞다. 난 이상하다. 내가 먼저 그 질문을 했던 이유는 이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단 것이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전혀 낯설다는 느낌을 못 받았다.



"너의 꿈이야."
여자아이는 꽃으로 만든 왕관을 내 머리에 씌워주고 대답을 해주었다.
" 웃기지도 않네. 이 나이에 꿈이라니. "
"후후훗. 겨우 19살 주제에 어른 흉내야? 내년에 성인이 된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넌 학생이라구?"
"이봐,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난 곧 수능을 앞둔 학생이라고. 지금 시시하게 꿈이나 꿀 때가 아냐. 여기서 나갈려면 ... "
볼을 세게 꼬집었다. 머리통을 쎄게 후려 갈겼다. 뺨을 미친듯이 때렸다. 눈을 감고 힘을 주었다. 아, 이건 텔레포트 할 때 쓰는건가. 아무튼, 어떤 수를 써도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 무릎에 머리를 두고 누웠다.
" 이왕 이렇게 된거 좀만 더 놀다가. 응?'
" 미치고 팔짝뛰겠네. 그래. 뭐하고 놀까. 숨박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꿉놀이? "
내가 말을 마치자 마자 여자아이는 한참동안이나 웃었다.
"이봐 이봐, 내가 겉으로 보기엔 일본 애니에 나올법한 로리같이 생겼지만 이래뵈도 너랑 같이 하루하루를 보내왔다구. 즉, 세월은 먹었단 말씀. "
"호- 최강동안이다. 이거란 거네. 꿈 속이니까 봐준다."
나와 그녀는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않는 주위 풍경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말을 꺼냈다.
"월그."
"그래."
당황한 기색을 하며, "이럴 땐 "뭐라구?"라고 얘기하는게 상식아냐?"
"지금 상황보면 슬슬 이름 말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래. 너무 이것 저것 따지지 말아줘."
그녀의 얼굴엔 '젠장,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다.'라고 적혀있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이여름. 미리 말해두는데 쓸데없이 여름드립 같은거 치지 마라."
"후훗. 다 알고 있다구."
그렇게 나와 월그는 지루한 일상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학교를 다니는데 모범생 이미지 관리하기 힘들다는 둥, 엄마가 해주는 반찬은 늘 짜다는 둥, 친구 한 명이 개념을 국에 말아 드셨다는 둥.
하지만 월그는 내 이야기에 맞장구만 쳐줄 뿐 자기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 인제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을 내두자. "
월그는 꽃을 꺽고 이번엔 반지를 만들고 있었다.
" 네 얘기를 들어보니까 느끼는건데 넌 꽤나 모범적인 아이구나 ? 성적은 그만큼 우수? "
"응, 당연하지. 전교 1등이니까. "
"흐음..." 지그시 날 바라본다. 정확히는 내 눈동자 속 안을 들여다 보는 것 같다.
"널 믿어볼래. 이번엔... 꼭.... 끝내기를.... 응... 믿을래. 후훗."
왕관을 쓰게 한 것도 모잘라서 손가락에 반지까지 끼워줬다.
난 반지를 만드는 재료에서 남은 꽃들을 코에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분명 기억이 나는 냄새. 어렴풋이 느껴지는 따뜻하고도 희미한 냄새.
두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아아.... 아..... 그런거였구나..... 여긴.........흑....."
여자아이가 날 끌어안아줬다. 그리곤 귓가에 속삭였다.




" 쭉 기다리고 있었어. 또 하나의 나, 여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