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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비밀창고
글쓴이 김률희
예지가 사라졌다.
'어, 금방 있었는데 어디 갔지?'
어느 새 내 눈은 책 읽는 아이들 틈을 잽싸게 비집고 다녔다. 예지는 보이지 않았다. 도서실 안쪽 방으로 갔다. 거기서는 편하게 눕거나 엎드려서 만화를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예지는 보이지 않았다. 예지는 나랑 같은 3학년이고 돌봄 교실에서도 짝꿍이다. 나는 방과후 곧장 돌봄 교실에 가서 밤 아홉시까지 저녁도 먹고 공부도 한다. 예지도 부모님의 퇴근이 늦어 나랑 늦게까지 남아 있을 때가 많다.
"뭘 보니?"
화들짝 놀라서 만화책을 덮었다. 예지였다.
"너, 어디 갔다 왔어?"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예지는 무슨 말이냐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돌봄 교실에서 공개수업을 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가장 좋았던 때를 그려 보세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얼른 예지를 쳐다봤다. 예지는 동그란 눈을 까박이며 무얼 그릴까 생각하는 듯 했다. 옆에는 엄마, 아빠가 서 있었다. 예지 엄마는 하늘거리는 스카프와 흰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연예인처럼 날씬하고 예뻤다. 예지는 놀이터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지 아빠는 옆에서 크래용을 꺼내 주고, 다 쓴 것은 집어넣어주었다. 예지는 그런 아빠는 쳐다보지도 않고 색칠만 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간 걸 보니 마음에 안 드는 걸 참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나 같으면 좋아서 콧노래라도 부를텐데....."
나는 엄마 아빠가 다 온 예지가 부러웠다.
"성훈아, 우리 저녁에 치킨 먹을까? 엄마가 집에 갈 때 가져갈게.'"
엄마는 공개수업에 못오는 게 미안했는지 아침에 말씀하셨다. 치킨 장사를 하면서도 하늘에 별 따기처럼 구경하기 힘든 치킨을 먹게 되다니, 오늘이 꼭 속상한 날만은 아니다.
"예지야, 엄마가 출장이라 지금 얼른 가야해. 잘 지내고 있어."
공개수업이 끝나자마자 예지 엄마는 서둘러 급히 나갔다.
예지는 엄마가 나간 문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예지의 그림에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와 시소에 앉아 있는 커다란 곰 인형이 있었다.
"난 엄마가 너무 싫어, 바쁘다고 맨날 돌아다니기만 해."
예지는 화가 난 듯 빠르게 말했다.
"난 어릴 때 아빠를 좋아했어. 엄마가 회사 가고 나면 아빠랑 많이 놀았거든. 아빠랑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소꿉놀이도 같이 하고 정말 재미있었는데."
예지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우리 아빠는 노는 날이면 피곤하다고 잠만 자는데. 너희 아빠 정말 짱이다!"
나는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하나 보다.

다음날 방과 후, 3층 체육실에서 놀이 수업을 하는 시간이었다. 짝꿍과 다리를 묶고선 돌아오기를 했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요즘 예지를 보면 가끔 그런다. 놀이 선생님은 질서를 잘 지켰다고 우리 팀을 칭찬해 주셨다. 줄을 맞춰 내려오는데 예지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사라진 걸까? 아까는 분명히 있었는데 선생님은 짝꿍을 잘 챙기라고 했는데 예지가 사라진 줄 알면 나까지 혼날 것만 같았다. 돌봄 교실로 내려오다가 다시 3층으로 올라가 봤다. 체육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내려가려고 중앙 층계로 가다가 위에서 내려오는 예지와 딱 마주쳤다.
"너 어디서 오는 거야?"
예지는 깜짝 놀라서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얼른 1층 돌봄 교실로 달아나 버렸다.
요즘 예지가 좀 이상하다. 자꾸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정신없이 잊어버리는 게 많다. 교실에도 리듬악기를 꼭 챙겨오라고 알림장까지 썼는데 안 가져왔다. 다행히 내가 탬버린을 빌려줘서 혼나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돌봄 교실에서는 이번 주 나랑 둘이서 당번인데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예지를 잘 챙겨야겠다.
마침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줄 서서 켬퓨터실로 가자."
선생님이 몇 번을 말하자 예지는 천천히 일어나 느릿느릿 줄을 섰다. 3층 컴퓨터실로 올라가는데 예지는 자꾸 뒤빠졌다. 선생님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느 틈에 예지가 보이지 않았다. 예지가 또 사라진 것이다. 나는 아까 예지가 내려왔던 4층으로 올라갔다. 살짝 예지의 옷이 보였다. 예지가 5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곳은 학교 행사를 할 때만 가고 평소에는 아이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강당이 있고 바로 옆에 화장실과 화장실 비품을 넣는 창고가 있었다. 예지는 벌써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스러웠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강당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다. 열쇠로 잠겨 있었다.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봤다. 아무도 없었다.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그 다음은 여자화상실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아, 여자 화장실인데 어떻게 들어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화장실 안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는 네 개의 문이 있었는데 서 개는 살짝 열려 있었고 한 개만 닫혀 있었다. 한 발 한 발을 옮기는데 누가 볼까봐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작고 짧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를 하자 힘없이 물이 열렸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예지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화장실을 나와 강당 옆에 있는 비품창고로 다가갔다.
"똑똑, 예지야!"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 후에 '찰칵' 하고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성훈이. 너 예지 맞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지야, 너 안에 있지? 맞지?"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나더니 낮은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 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
"네가 걱정 되서 왔지."
나도 모르게 쉰 목소리가 났다.
"왜 왔어? 얼른 내려가!"
예지가 엄마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때였다. 갑자기 건너편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 거기 누구 있어요?"
남자 어른의 목소리였따.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나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 몰라 둘러보는데 발소리가 강당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분명 무슨 소리가 났는데‥‥‥. 여긴가?"
다시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예지였다. 나는 얼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여기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학교를 지키는 기사 할아버지셨따. 귀가 약간 어두워서 작은 소린느 못 듣는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있는 비밀창고 문을 돌렸다. 문이 열리지 않자 세게 몇 번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너무 놀라 손을 잡았다. 예지의 손의 촉촉했다.
"문이 고장났나? 다음에‥‥‥."
문을 잡아당기던 소리가 멈췄다.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져갔다. 후우,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나왔따.
"완전 큰일 날 뻔했네. 학교 할아버지한테 들킬 뻔했어."
뒤따라 나오는 예지도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학교 할아버지한테는 비밀이야. 알지?"
예지가 갑자기 친한 척을 했다.
"알았어. 그런데 혼자 몰래 오는 곳이 여기였어?"
나는 예지가 이런 곳에 자주 왔다는 게 이상했다.
"응. 여기는 내 비밀창고야.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 장소. 네가 처음 본 사람이야."
예지는 잠깐 고민하는 듯 아무 소리가 없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 비밀창고를 보여 줄게."
예지가 문을 열자, 울긋불긋한 보자기와 곰인형, 소꿉놀이가 눈에 들어왔다. 청소용구를 담는 비품창고가 마치 예지의 작은 방 같았다. 예지는 크고 동그란 눌을 잠시 감더니 숨을 들이쉬고 멈췄다. 뭔가 큰 결심을 하는 듯 이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말했다.
"실은 지난 번 공개수업 때 온 사람은 새아빠야."
"뭐?"
"새아빠는 정말 나한테 잘해 줘. 맛있는 것도 사주고 같이 놀아 주고."
예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난 아빠라고 부를 수가 없어. 우리 아빠한테 너무 미안하거든."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래. 아저씨라고 불러도 삼촌이라고 불러도 된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
하지만 예지는 먹구름이 가득한 얼굴로 볼풍선을 불며 말했다.
"야, 뭐가 걱정이야. 친아빠랑 새아빠랑 같이 만날 것도 아닌데 그냥 아빠라고 부르면 되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나를 예지는 가만 바라보았다.
"실은 이 곰돌이 말이야."
예지는 비밀창고에 있떤 곰 인형을 안으면서 말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털이 빠지고 꼬질꼬질 때가 잔뜩 묻었는데 예지는 무척 소중한 아가처럼 포근하게 안았다.
"아빠가 어렸을 때 사준 거라 잠잘 때 꼭 끌어안고 잤거든. 그런데 새아빠가 너무 낡았다고 새 걸로 사주셨어. 낡은 건 버리라는데 난 버릴 수가 없었어. 그래서 곰돌이를 여기다 놔둔 거야."
예지가 자꾸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곰돌이를 여기 놓고는 잘 있는지 궁금했어. 그래서 자꾸 오게 된 거야."
예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음 날, 학교 할아버지는 비닐봉투에 곰인형, 소꿉놀이, 보자기를 한 가득 들고 돌봄 교실에 오셨다. 고장난 문을 고치고 그 안에 있던 물건을 정리했다고 했다.
"허허, 도대체 이게 누구 짓인지 모르겠네."
할아버지는 주인을 찾아 주려고 교실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예지를 쳐다보았다. 예지의 얼굴이 하얘졌다.
"할아버지! 잠깐만요."
나는 학교 할아버지 앞을 가로막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응? 왜 그러니?"
"그 곰돌이 인형 제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던 인형인데 잃어버렸거든요. 여기 있었네. 제가 잘 갖고 있을 게요."
"그래? 자기 물건은 잘 간수해야지."
학교 할아버지는 비닐봉투에서 툭툭 먼지를 털어 내 손에 넘겨주고 가셨다. 예지는 내 손에 온 곰돌이 인형을 보며 솜사탕처럼 하얗고 가벼운 얼굴로 말했따.
"고마워, 성훈아. 내 대신 곰돌이 잘 부탁해."
"알았어, 걱정마. 내가 잘 데리고 갈게."
나는 예지 대신 곰돌이의 비밀 지킴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날 저녁, 예지를 데리러 새아빠가 돌봄 교실에 오셨다. 예지는 겉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새아빠를 따라 교실 문을 나섰다. 나는 아직도 안 오는 아빠를 기다리며 창문을 내다봤다. 캄캄한 밤에 새아빠와 예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 예지의 조그만 가방이 넓은 새아빠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 달랑거리며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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