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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월그 2
글쓴이 최자인
어느날 갑자기 일어났다.
"꼬마야, 오빠가 저쪽 골목에 갈려 하는데 다리 한 쪽을 다쳤어. 날 좀 도와줄 수 없을까?"
그 교복은 분명 우리 오빠가 다니고 있는 중학교.
" 저기까지 날 부축해주면 고맙겠는데... 응? "
검은 손은 벌써 내 팔뚝을 잡고 있었고 이미 정신 차렸을 땐...
머리부터... 발 끝 까지.... 몸 구석 구석.... 검게.....



"잊고 있었어. 기억하기 싫었으니까. 그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기엔 세상이 너무나 무섭고 원망스러웠어. 그래서... 그래서..... 잊어버렸던 거야..... 월그.... 날 이해해줄래?"
월그는 살며시 일어나 꽃밭을 돌아다녔다.
" 원망하면서 널 기다리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어. 더 이상 원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울지는 않아. 그저 너가 오기만을 이 때 까지 기다렸어. 처음 너를 만났을 때의 마음 가짐으로 한참동안... 그래.... 오랫동안 말야. "
월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꽃 한 송이를 꺾어 내 품에 넣어줬다.
" 인제 돌아갈 시간이야. 여름아. 너가 해야할 일을 잘 생각해줘. 부탁이야. "
" 응... 나 갈께. "



조용히 눈을 떴다.
그래,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몇 분동안 천장만 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교! 지각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시계는 8시 20분을 향하고 있었다.
" 똑, 똑 - "
"여름아. 일어났니? 깨울려고 하니까 열이 너무 많이 나길래 오늘 학교에 못 간다고 얘기해뒀어. 오늘은 집에서 푹 쉬렴."
"죄송해요, 엄마. 고3인데 몸 관리 하나 못하고... 나아지면 학교에 다시 갈께요. 일은요? "
"안 그래도 지금 갈려던 참이야. 식탁에 아침 채려놨으니까 그거 먹어. 엄마 갈께- "
아침을 다 먹은 뒤 잠옷을 벗으려 했다. 땀에 흥건히 젖어 짜증을 내던 도중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회색빛이 도는 꽃. 그렇다. 이것으로 꿈에서의 일이 확실해 진 것이다.
"인제...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어... 난.. 끝을 내야해."
두근두근 뛰는 내 심장이 의무감을 한층 더 높여주었다.




" 지금쯤 일어났겠지? "
꽃밭 한 가운데에 있는 연못에 가 발을 담궜다.
회색빛의 물결이 타원형을 그리며 멀리 멀리 퍼져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까.... 여름이와 날 위해서... 이 세계를 위해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여름이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보는 아이가 꽃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너무나 검었다. 칠흑처럼, 까만 도화지 처럼 검었다.
" 친구야,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니? "
"흐흑....으...흡.... 흐흑.... 흐...... "
대답해야될 의무라도 있냐는 듯 무시한채 울기만 하였다.
" 이럴 땐 어떻게 해야되지... 나 어떻게 해야 돼? 어쩌지 어째....아! "
난 조심조심 다가가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안아줄려고 팔을 뻗었다.
손이 닿자 마자 그 친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벌떡 일어났다.
혐오스럽다듯이 소리를 질러 댔다. " 만지지마, 만지지마, 만지지마! 꺼져! 죽어! "
"나... 난... 위로해줄려고..흐...한....건데... 흐흑... 흑..."
내가 아무리 미안하다고 말해도 친구는 '만지지마', '꺼져', '죽어버려' 란 말만 되풀이 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지쳤는지 친구는 연못에서 잠이 들었다.
난 생에 처음 만난 친구를 위해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에 빠졌고, 곧바로 꽃을 꺾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제일 잘 만드는 꽃왕관을 선물로 주면 좋아할지도 몰라.'
친구 옆에서 난 왕관을 만들었고 그녀가 깰 때까지만 기다렸다.
" 으,응.... 여긴..... "
"아, 일어났니? 마침 잘 일어났어. 자, 여기!"
꽃왕관을 친구 머리에 올려줬다. 머리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히 올렸다.
"후후후훗. 너 왕관 쓰니까 공주님 같애, 이쁘다. 맘에 들어?"
"나 꽃 싫어."
"윽... 그..그래.." 정곡을 찔렀다.
혹시나 이럴까봐 여분으로 만든 반지를 내밀자 똑같이 싫다고 하였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친구는 아주 조금 미소를 지었다.
" 바보같아. 크큭. "
" 웃어줬어 지금! 나 무지무지 기뻐! "
"시끄러, 안 웃었어."
"에- 조금이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갔었다구-"
그렇게 우린 연못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놀았다.
하루 하루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놀기만 하였다.
" 그러고보니 서로 이름을 말 안 해줬네. 내 이름은 여름이야. 넌? "
"나? 난.... 그게.....저...."
"뭐야, 너. 이름도 없는거야?"
난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꽃밭만 바라보았다.
" 그럼 내가 지어주면 되지 뭐. 음.... 여긴.... 온통 회색인 곳이고.... 너도 모두 회색이야... 그럼... 월그. 응, 좋아. 월그야. "
"뭐,뭐? 월그라니. 로봇 이름 같아서 싫어!"
그러자 여름인 더 화를 내며 억지를 세웠다.
" 뭐야, 딱 좋구만! 너 영어로 회색이 뭔 줄 아니? Gray야. 그레이라 하면 너무 식상하니까 꺼꾸로 불러서 월그(Yarg)라 해준건데. 얼마나 멋져! 아무튼 넌 오늘부터 월그야. "
"치이.... 치사해."
말은 그랬지만 마음 속으론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다는 걸 알곤 나름 만족했다.
하지만 이런 나날은 계속 되지 않았다.
"돌아가야.... 돼......."
"뭐라고 월그? 잘 안들려."
" 너 지금 돌아가야돼.... 지금 당장..... "
여름인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과음을 질렀다.
"왜! 도대체 왜! 난 여기 있고 싶어! 너랑 계속 여기서 놀꺼라구! 그리고 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나도 잘 몰랐다. 그냥 그런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머릿 속에선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떠돌고 귀에선 '돌아가야 돼'라고 메아리 치는 것 같았다.
"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우리... ? 난.. 여름이가 무척 보고싶을꺼야."
"그러니까 난 계속...여기있을거라.......니까.....월........"
여름이는 사라졌고 또다시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회색인 나와 달리 검게 생긴 여름이가 신기해서 좋았는데 이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래도 다음엔 또 만날거라 믿고 난 여름이를 기다렸다.
지금 이 기억을 회상하는 날 까지..... 말이다.



같은 시각, 다른 공간에서 우린 서로를 향해 외쳤다.
" 지금부터 시작이야. 여름아. "
" 곧 끝을 내는거야, 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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