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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백합은 아직 피지 않았습니다.
글쓴이 최자인
" 7반에 온 전학생 봤어? 정말 잘생겼더라! "
" 맞아맞아. 아, 하지만 내가 먼저 찜뽕했어! 손 데지마! "
"무슨 소리야, 걘 내꺼야!"
아침부터 소란스럽다싶더니 7반에 잘생긴 전학생이 온 모양이다. 나도 궁금했던 참이라 친구들과 같이 보았지만 딱히 내 눈엔 들어오지 안았다.
다시 교실에 들어가자 반에는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인하가 보였다.
그녀는 길고 매끈한 생머리에 해리포터처럼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다. 눈을 보자면 마치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만큼 깊고 그윽한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그런 눈동자를 살며시 덮는 눈썹들은 인형을 연상케 만든다.
" 인하야, 무슨 책 읽고 있어? "
" 유정이구나.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인데 되게 재밌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께서 지으셨거든. 너도 시간이 된다면 한 번 읽어봐. "
" 그래. 어라, 이거 브로치야? "
앞서 말하지만 브로치를 보자마자 그녀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 응, 이쁘지? 조금 화려한 감이 있긴 한데 마음에 들어서 사봤어. 너는 이거 어때? "
인하는 갑자기 자기 교복에 달린 브로치를 보여주기 위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야,야아 너무, 가, 가깝잖..."
" 어때, 가까이서 보니 더 이쁘지? "
내 눈엔 반짝이는 브로치보다 인하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 이뻐... 정말... 이뻐... "
" 그렇지? 사길 정말 잘했어. "
인하는 브로치 얘길 끝내고도 계속 나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아까의 인하 얼굴이 둥둥 떠다녀 미칠 지경이었다. 한참동안 망상 속에 빠지다가 인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 유정아, 유정아! 내 말 듣고 있는거야? "
" 아, 미안해. 잠시 딴 생각 좀 했어. 다시 얘기해줄래? "
"정말, 그러니까 이번주 토요일에 우리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구."
그 뒤엔 필름이 끊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인하와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대충 던진 뒤 내 방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휴대폰 카메라로 내 얼굴을 보니 아직도 홍당무처럼 빨게져 있었다.
" 아까 그래서 인하가 나보고 열이 있는지 물어봤구나. 아 창피해- ... "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챘을 거다. 난 사실 남들과 달리 특별한 부분이 있다. 일명 레즈비언,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내 자신을 레즈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양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하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들 같은 10대 때는 친구와의 우정 사이에서 동성애를 느낄 수도 있다고 말이다. 난 그 말씀을 믿고서 잠시동안의 착각 아닌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보이그룹을 좋아했던 시절이 짧게 나마 있으니까 양성애자 인 것이 맞을거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런 생각마저 약해지고 있다. 아무리 초절정 꽃미남을 보아도 심박수는 보통 때와 똑같다. 내 마음에서 " 이건 사랑이 아냐. " 라고 판단해버린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고 판단한 것 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때는 인하 앞에서다. 그녀는 새학기 첫 날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곁에 있을 때 맡아지는 샴푸 냄새까지 내 심장을 찌른다.
어째서일까, 왜 인하 앞에서만 이렇게 두근두근 거릴까. 나도 참 미친 것 같다.
나도 사실 보통 여자아이들처럼 지내고 싶다. 짝사랑 하는 남자에게 고백을 해 사귀다가 결혼까지 골인해 아이를 낳아 오순도순 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느끼는 점은 그 남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남자와의 신체접촉은 벌레를 만지는 만큼 싫다.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사실이다.
아무튼 인하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되니깐 미리 예습을 해두고 갈 것이다.
우등생이자 모두에게 총망받는 그녀에게 폐가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공부를 하다 책상에서 잠이 들었다.



" 너 레즈였어...? 미친, 더러워. "
" 얘들아, 어제 문자 돌린거 봤어? 유정이 쟤 사실 레즈래. 더럽지않냐? "
" 사진봤지? 화이트데이 때 어떤 여자애 책상 속에 사탕 넣는 거 말야. 다시 봤어 진짜. "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몸 속 깊은 곳 까지 울려퍼진다.
초록색 시금치 교복을 입고있는 걸 보니 중학생 때 인가 보다.
" 엄마... 나... 전학 가면 안될까? "
" 얘가 갑자기 무슨소리야? 왕따라도 당해? "
"아, 아니... 그냥, 여기 너무 어수선해서 공부에 집중이 안된달까... 환경이 나에게 부적합하다해야되나... 그냥 못 들은걸로 해. 나 잘께."
난 중학교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 책상 속에 캔디세트를 몰래 넣었다. 교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누군가는 나의 모습을 폰으로 찍었고 단체로 문자를 돌려 난 모양좋게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책상엔 지워지지 않게 유성매직으로 레즈년, 더러워, 꺼져 이런 식으로 욕설이 적나라게 적혀있었고 교과서와 필기도구들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가끔은 야한 레즈 사진들을 프린트해 내 얼굴에 뿌리고 도망간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난 그런 지옥같은 나날 속에서 공부라도 잘해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결국엔 가기 어렵다던 상위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엔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이 없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3월 2일 입학식이 열렸다.
선배들이 우리의 가슴에 입학을 축하한다는 꽃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난 수많은 인파 속을 빠져나와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마친 뒤 손을 씻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 때 누군가가 화장실을 급하게 들어와 나와 세게 부딪쳐버렸다. 나는 놀랜 마음에 자빠져버렸고 손수건은 화장실 바닥의 꾸중물에 젖어버렸다. 아끼는 손수건이 젖어버린만큼 화를 낼려고 목소리에 힘을 준 순간 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첫인상은 그냥 아름다웠다. 긴 치맛자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를 조심히 가려주었고 깊은 눈매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안경이 콧뼈에 걸려있었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길고 검은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봉숭아 색을 띄우는 입술이 움직였다.
" 죄송해요. 볼일이 급한바람에... 괜찮아요? "
" 아... 그..... 그게.... "
" 손수건이 베려버렸네, 괜찮으시면 제 손수건을 쓰실래요? 오늘 아침에 빨아서 깨끗할거에요. 정말 죄송해요. "
" 인하야, 중학교 선배님들이 잠시 만나자는데 얼른 가자-! "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곧게 허리를 숙이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짧은 순간이였지만 그것이 나와 인하의 첫만남이다.




" 띠리리리리- 띠리리리- "
" 음... 여보세요...? "
" 이럴 줄 알았어. 인하야.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빨리 준비해서 나와, 학교 가야지. "
늘 듣는 소리지만 아침마다 오는 인하의 전화에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띄어진다.



"응, 알겠어. 인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