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라 하더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펀펀한 운동장을 보더라도 동쪽이나 서쪽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고, 높은 데서 보는 것과 낮은 데서 보는 것이 저마다 차이가 있다. 정면에서 보는 것과 모퉁이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사물을 기술할 때는 일정한 관점이 정해져야 한다. 독자에게 사람의 모습이나 사물의 모양을 정해진 관점에 서서 그려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덮어놓고 독자 앞에 그려 보여서는 안 된다. 자신이 그 사물을 어떤 각도에서 보고 있는지를 뚜렷이 하고서 그려야 한다.
[보기 9.23]
돌산 위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영화에 나오는 옛 성의 모습 처럼 보인다. 우뚝우뚝 솟아 있는 건물들 가운데는 잿빛나는 돌집이 끼어 있다. 하얀색으로 산뜻하게 보이는 건물도 눈에 띈다. 우아한 핑크빛으로 단장한 집들도 섞여 있다. 크고 높이 올라간 건물들 주위에는 얕으막한 건물들이 딸려 있기도 하다.
윗 글은 필자가 어느 방향에서 어떤 쪽으로 바라보면서 묘사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 그래서 그 정확한 모습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면 한결 뚜렷한 묘사가 될 것이다.
[보기 9.23']
북쪽으로 조그마한 강을 바라다 보이는 돌산은 영화에 나오는 옛 성의 모습처럼 보인다. 맨 아랫쪽 중간에 잿빛나는 육중한 돌집이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왼쪽과 바른쪽에는 하얀 빛으로 산뜻 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그 뒷쪽으로는 핑크빛으로 단장한 집들이 아래 건물들을 에워싸듯 들어서 있다. 이런 크고 높은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묘사의 관점은 대개 고정적인 관점과 움직이는 관점으로 나누어진다. 앞것은 필자가 어떤 일정한 관점에 서서 좌우상하 또는 원근으로 바라다 보면서 묘사하는 경우이다. 뒷것은 필자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관찰하여 묘사하는 경우이다.
(1) 고정적인 관점에서의 묘사
고정적 관점에서의 묘사란 한 자리에 서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려 나가는 것이다. 위의 [보기 9.23]이나 [보기 9.23']은 고정적 관점에서 묘사된 글이며, 다음 보기들도 같은 관점에서 묘사된 글이다.
[보기 9.24]
나의 눈길이 미치는 왼쪽으로는 옷장이 문이 열린 채로 있었다. 그 안에는 여름옷이 카버가 씌워져 걸려 있었고, 선반에는 구두가 가즈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의 화장대는 기숙사에 갈 때 물건을 거의 다 가져갔기 때문에 비다시피 되어 있었다. 다만 남아 있는 몇 가지 것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거울 주위에는 고등 학교 시절에받았던 초대장, 쓰던 물건, 그리고 기념품들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벽에는 학교 회화반에서 그렸던 그림이 걸려 있는데 강의 물빛이 너무나 푸르러서 이상하게 느껴진다.
윗 글은 필자의 눈길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방안의 풍경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침대에 누워 있었거나 앉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눈길만 돌려가면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윗 글에서 느껴지는 두드러진 인상은 대학 생활로 성장한 뒤에 집에 돌아와서 느끼는 독특한 감회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두드러진 인상과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으면 초점 있는 묘사라 할 수가 없다.
다음 글도 일정한 관접에서 바라보는 묘사법이 보인다. 원근을 두고 바라 보며 묘사를 하고 았다.
[보기 9.25]
북한산은 어느 쪽에서 보나 풍광이 수려하다. 그 산 한쪽 옆구리로 뻗친 산자락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라 보인다. 아파트 옆으로 나있는 조그만 문 밖으로 하늘을 찌를 듯 가득 찬 아카시아 숲이 우거져 있다. 숲을 지나 한길 건너편에는 바로 산으로 통하는 길이 나타난다. 창문을 열고 늘 대하는 산이요 숲이지만 알싸한 공기를 마시며 바라 보노라면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도착한 고향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것 같은 안온함이 있다.
-- 이상일, "푸른 아침," <한양 에세이>
(2) 움직이는 관점에서의 기술법/묘사법/서사적 기술법/ 묘사법
때로는 필자가 이동하면서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정적인 관점에서의 묘사가 쓰이지만 이런 움직이는 관점에서의 묘사도 가끔 볼 수 있다. 이런 글은 서사적 묘사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기 9.26]
우리는 모래 바닥에 가파른 돌벽으로 에워싸인 계곡을 따라 좁은 길로 들어섰다. 입구는 매우 거칠었다. 우리는 거친 돌 벽을 기어 오르기도 하고 딱딱한 바위로 된 붉은 모래톱(암초) 사이의 언덕에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그 길의 언덕배기는 칼날 같았으며, 거기서부터는 거의 막혀지다시피 한 틈새를 비집고 내려왔다. 이 샛길은 떨어진 옥돌로 반쯤 막혀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종족들의 표지가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길을 이용하였던 족속들이다. 그 후에는 나무들이 자랄 만한 장소로 변해 있었으며, 겨울에는 그곳에 퍼붓는 빗물받이가 되어 있었다. 화강암이 여기저기에 널려져 있고 고요한 물은 고운 은빛 모래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그 물길은 해이단으로 뻗쳐 있었다.
-- T.E. 로렌스, <지혜의 일곱 기둥>
윗 글에서는 한 사람이 계곡길을 오르고 그 고갯길을 넘어서 딴쪽으로 내려 가면서 묘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관점이 이동되는 데도 묘사에 중점이 놓였기 때문에 묘사법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 이동 사실 자체에 중점이 놓이면 묘사문이라 할 수가 없고, 뒤에 말하는 서사문에 속할 것이다.
아래의 예문도 이동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다.
[보기 9.27]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길로 내려 섰다. 전날은 만경대에 끌려 왼편으로 돌았으나 오늘을 오른쪽 능선이다. 인적이 적고 길이 뚜렷하지 못하다. 한참을 돌아 내리니 두개의 봉우리가 버텨 선다. 바위틈을 오르내리는 길이 제법 험하다. 끝봉에 도사린 여러 개의 바위들이 매눈을 번뜩이며 대공원 쪽을 응시하고 앉았다. 매들의 형상이다. 제일 높은 암상에 나도 서서 대공원과 저수지를 굽어본다. 누가 명명했는지, 오묘한 이름(매바위)이다.
--정만영, "청계산에 두고 온 안경"
윗 글은 만경대의 오른 쪽 능선을 쫓아 올라 가면서 주변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다음 글도 묘사의 관점을 이동하면서 묘사를 하고 있다. 특히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여러 번 바라 보았던 광경을 그려 보이는 점이 색다르다.
[보기 9.28]
남편을 만나러 다닐 때 타고 다녔던 중앙선 열차는 산악 지대로 달렸다. 산비탈을 힘겹게 오르던 기차는 산중에서 쉬었다 가기도 잘 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날, 치악산 봉우리에 걸려 있는 구름 안개를 뚫고 기차가 달릴 때는 별천지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른 봄 산비탈 밭을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여 놓은 복사꽃은 나를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초여름 흐드러지게 핀 싸리꽃과 찔레꽃에 취하기도 했다. 한 여름 나절 산골 기차역마다 피어있는 봉선화와 채송화는 나를 옛집 안마당 꽃밭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발갛게 익은 갖가지 열매들은 어릴 적 같이 자라던 또래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산허리르 감아돌면서 내려다 보이는 산마을이, 또 산마을로 향하는 고개길이 정처없는 나그네의 설움에 젖게 했다. 기차역마다 두서너 채 굴뚝 연기를 길게 뽑고 있는 관사가 여정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기차길 옆으로 펼쳐져 잇는 단양 팔경도 계절마다 모습을 바꿔가며 내 눈길을 끌었다.
-- 여인언, "길들여진 맛," <한양 에세이>
|
HOME > 
4. 기술법/묘사법의 관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