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 단락은 소주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잠재되는 수도 있으나 글의 표면에 나타나서 글의 핵심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일이 있음을 지적 했다. 또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서 소주제를 한층 명확히 드러내도록 하는 일이 많음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소주제를 정하여서 표면에 내세우고 설명을 곁들인다 해도 그것을 떠받드는 재료가 잘못 되어 있으면 소주제는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이 소주제인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 단락의 경우에 소주제를 잘 드러내게 하는 중요한 원리를 여기에서 익히고자 한다.
[보기 9.30]
철수는 어떤 어린이보다도 정직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애는 일전에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길 위에 돈지갑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든 철수는 그것을 열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파출소로 달려갔다. 옆에서 그애를 지켜보던 친구들이 따라와 철수를 붙잡고 그 지갑을 먼저 열어 보기라도 하자고 졸라 댔다. 그러나 그애는 남의 물건을 펼쳐 보려는 호기심은 벌써 나쁜 마음의 씨라고 대꾸하고는 친구의 손을 뿌리쳤다.
윗 단락에서 맨 앞줄의 문장이 소주제문이고 나머지는 모두 뒷받침문장들이다. 소주제문이 그 글의 머리요 넋이라면 뒷받침문장들은 그것을 지탱하고 떠받드는 몸통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뒷받침문장은 그 내용 면에서 소주제와 일치되어야 한다. 소주제문이란 글의 요지이고 그 글의 재료는 뒷받침문장들이므로 결국에는 서로 같은 내용이라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이 두 요소가 서로 딴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면 초점이 분명한 단락을 이룰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소주제문은 "동쪽으로 간다"고 말하는데 그뒤의 문장들은 "서쪽으로 간다"고 서술하는 꼴이니 일정한 핵심이 있는 글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소주제와 그 뒷받침문장들은 결국에는 한 방향으로 나가는 내용 곧 결과적으로 같은 내용을 서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통일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으로서 모든 글쓰기에서 철칙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보기 9.31]
그 부인은 글자 그대로 헌신적인 가정 주부이다. 그 여자의 하루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려고 새벽같이 일어남으로써 시작된다. 남편이 자고 있는 동안에 목욕을 하고 옷을 차려 입고 화장을 한다. 남편이 신문을 보고 말없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에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 여자는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아이들을 깨워서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점심을 싸주어 학교로 보낸다. 때로는 학교까지 차를 태워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남편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조용히 말하고 실행한다. 남편이 직장으로 떠난 뒤 그 부인은 다시 일을 계속한다. 접시를 닦고 잠자리를 치우고 집안의 쓰설이를 한다. 그 여자는 남편이 창틀에 낀 먼지에 민감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어서 세탁을 하고 시장을 본다. 오후에는 아이들을 치과 의사에게 데려 가기도 하고 피아노 레슨이나 그 밖의 일로도 데리고 다닌다. 이런 일이 끝나면 바로 저녁을 짓는다. 물론 그 여자의 요리 솜씨는 바느질, 다리미질, 쓰설이, 그리고 손님 접대 솜씨와 마찬가지로 훌륭하다. 이윽고 남편이 돌아오면 그 여자는 또 남편의 하루 일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며 상냥한 말을 건넨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의 기분을 풀어주거나 조용히 혼자 쉬도록 배려한 다. 마침내 잘 시간이 되면 남편의 둘도 없는 애인이 된다.
-- 설리반, 단락 연습 중에서
이 부인의 하루 일과가 눈으로 보는 듯이 펼쳐지고 있다. 이 모든 행동은 다 소주제인 첫 문장과 관련을 가진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문장도 그 소주제와 무관하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이렇게 모든 뒷받침문장이 소주제를 떠받드는 내용이 되어야만 소주제가 통일적으로 드러나서 초점이 분명한 단락이 된다.
그러나 윗 글에서 만일 한 뒷받침문장이라도 소주제와 어긋난 것이 섞이게 되면 주제의 선명도는 그만큼 지장을 받는다. 이를테면, "이윽고 남편이 돌아오면 그 여자는 또 남편의 하루 일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며 상냥한 말을 건넨다."와 같은 뒷받침문장 대신에, "이윽고 남편이 돌아오면 그 여자는 남편의 하루 일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기는커녕 본체만체하고 일이 너무 힘들다고 짜증만 낸다."와 같은 문장이 끼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주제문이 나타내는 바와 뒷받침문장은 온전한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남편에게만은 온전히 헌신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소주제문의 뒷받침이 그만큼 약하게 되고 글의 초점이 흐리게 될 수밖에 없다.
다음 보기는 옛날의 일화를 가지고 소주제를 펼치고 있다. 첫 문장이 소주제문이라고 할 때 그것이 통일적으로 받들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자.
[보기 9.32]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저버리기 쉽다. 옛날 어떤 어머니가 아들의 장래에 관해서 의논하고 조언을 얻기 위해서 그를 데리고 마을의 현자를 찾아갔다. "우리 아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이나 책과 씨름을 하며, 무엇을 물어 보아도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많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공부와 지식에 대해서 이 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했다. 한참 만에 현자는 입을 열어, "아깝게도 바보가 되어 있겠군." 하고 말하였다. 그 영문을 몰라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쳐다만 보고 있노라니, 현자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지식을 얻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바보가 될 수밖에 없지" 하는 것이었다.
--정원식, "생각하는 경험" 중에서
윗 글에서는 일화의 내용이 소주제문을 힘있게 떠받들어 주고 있다. 이야기 전체의 취지가 그 소주제문에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요지를 나타낸 것이 바로 소주제문이 되어 있으므로 온전히 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현자의 말에서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라는 식의 양시론(兩是論)이 나타났다면 소주제와 맞지 않는 뒷받침이 되고 만다. 또 반대로 소주제문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과 사고력 배양이다"와 같이 되어 있다면 위의 일화가 나타내는 바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도 통일성의 원리는 깨뜨려지고 말 것이다.
다음 단락은 소주제문이 표면화되지 않고 있는 이야기이다. 통일성이 있는지 살펴 가며 읽어 보자.
[보기 9.33]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만원 버스 안에서 나이 많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 쳐다 보더니 말없이 앉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저는 당연한 행동을 하였고 그분은 양보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어떻든 저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안 좋았고, 다시는 양보 행위를 않겠다는 속좁은 생각마저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만일 그분이 "고마워요"라고 한 마디 건네 주었더라면 그 상황은 펴 달라졌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언어 문화적 전통에서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벼이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새기는 은근함이 더욱 소중히 여겨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뭇사람이 부딪치고 사는 현대 사회일수록 천냥빚도 갚는다는 그 말 한마디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서진환, "우리의 인사말" 중에서
위 글에서는 자기가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소주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고맙다는 표현의 아쉬움"임을 직감 할 수 있다. 이 글의 서술 과정에서 곁들여진 필자 나름의 생각이나 해석은 소주제의 펼침에 도움을 주고 있다. 어떻든 이 글에서는 하나의 소주제를 마음에 두고 거기에 알맞는 재료들만을 골라서 서술하였다. 이 단락은 소주제를 펼치기에 알맞은 재료만을 선택하여 서술함으로써 통일성의 기본 원리를 따르고 있다.
요컨대, 우리가 이제껏 살펴 본 통일성의 원리란 소주제문과 이야기의 내용을 펼친 뒷받침문장들이 내용적으로 한덩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뒷받침문장들은 사실상 이야기를 전개 해 가는 여러 가지 재료들이다. 행동, 보고 들은 사건 또는 고사나 일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재료인 것이다. 이런 재료들을 나타내는 모든 뒷받침문장들은 소주제를 중심으로 엮어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통일성의 원리이다.
한편으로, 이야기 서술에서 그 재료를 배열하는 과정에 곁들여지는 설명 따위도 소주제를 뒷받침하는 데 관련된 내용이어야 한다. 이런 설명은 앞에서 보았듯이 소주제를 뚜렷이 드러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므로 당연히 소주제와 관련이 있고 뒷받침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만일 그런 설명 내용이 소주제와 관련이 없거나 거슬리는 것이라면 단락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다음 단락은 상당히 긴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통일성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특히 줄거리 사이사이에 끼어든 설명적 묘사도 소주제문에서 벗어남이 없다.
[보기 9.34]
지난 가을은 유난스레 많은 날들을 자연 속에서 뜻깊게 보냈다. 시월의 첫번째 주일을 강원도 오대산과 계방산이 이어 지는 높디 높은 능선과 깊고 깊은 계곡을 헤메이며 시작하였다. 찬 계곡의 물소리를 옆으로 들으며 동글동글 매어 달린 산국의 봉오리들이 하나 둘씩 꽃잎을 펴기 시작하고 산국과 함께 가을꽃의 세 주인공인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한창이었다. 둘째 주에는 학생들의 식물 공부를 핑계 삼아 경북의 야트막한 산을 넘었는데 그곳의 산길에 피어 있던 산국들도 이제 피거나 피어나기 시작하여 싱그러웠고 함께 자라고 있던 투구꽃(초오)은 보라색 꽃 잎에 금빛이 함께 돌아 참 예뻤다. 세번째 주에는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여 서산을 지나 천리포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만난 감국이 주변의 감탕나무 붉은 열매와 멀리 들리는 파도 소리와 잘 어울어졌고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한반도 크지 않은 땅덩어리의 끝, 해남의 토말을 스치고도 모자라 완도까지 갔다가는 더 이상 남쪽으로 이어 지는 길이 없어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섬진강을 넘도록 돌아 다녔는데 어느 곳엘 가나 우리의 들녁, 바위틈, 산언덕, 길가엔 들꽃이 한창 흐드러진다. 가을의 꽃은 어느 곳엘 가나 꽃을 피우는 속도가 그저 그만한 듯 싶다. 북쪽과 남쪽에서 느껴지는 계절의 차이를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피기 시작하는 봄꽃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어떻든 이 가을엔 "세뿔투구꽃이라도 구경 할 수 있는 행운이라도 있으려나?" 피로한 줄도 모르고 자연의 품을 무던히도 후집고 다녔다.
윗 글의 서술 내용은 첫문장에 나타난 소주제문으로 요약된다. 곧 우리 땅떵이를 동서 남북으로 헤매며 자연의 품 속에 피어나는 가을 꽃들을 관찰하며 많은 날들을 뜻있게 보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모든 서술 내용이 이런 요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관계 깊은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만큼 긴 단락에서 통일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도 이 필자는 그것을 무난히 해냈다. 이는 통일성의 원리를 의식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 가짐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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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단락과 통일성의 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