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문에서는 행동자의 행동과 관련하여 (1) 동기, (2) 성격 그리고 (3) 배경 등 세 가지 요소를 중시한다. 서사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드러내는 것이 행동의 동기이다. 서사문에서는 행동자가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 행동을 하는 데에는 때와 장소 등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서사문은 위 세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고 펼쳐지며 또 그것은 서사문이 드러내는 "의미" 곧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행동의 동기
서사문이 드러내는 의미는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 동기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보여 준 행적을 다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분이 갖가지 악 조건을 무릅쓰고 거북선을 만들고 왜적을 무찌르는데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운 사실을 다 안다. 이런 이순신 장군의 행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그분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동기를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분의 동기는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이 무엇보다도 강했다고 볼 수가 있다. 이 경우는 그분이 한 행동은 위대한 애국자적 행동으로 빛나는 것이다. 그분의 행동 동기가 무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한다는 점에 역점이 놓여 있었다고 하면, 그분은 위대한 무인으로서의 행동을 보여 준 것이 된다. 그분이 만일 임금에 대한 충섬심을 가장 큰 동기로 여기고 있었다면 그분은 무엇보다도 만고 충신으로서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또 만일 그분이 이런 모든 동기를 동등하게 다 지니고 있었다면 그분은 위대한 애국자요, 무인이요, 충신이라는 3가지 영예를 다 한몸에 지니는 행동을 보여 준 것이 된다. 사실상 그분은 그러한 위대성을 다 갖춘 이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아닌 문예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 동기는 그 작품의 주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많이 본다. 필자는 작중 인물의 행동에 특정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건을 여러 가지로 펼치고 거기에 따라 자기가 내세우고자 하는 의미(주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령,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나 춘향이가 하는 행동에 각기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작자의 의도가 뚜렷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춘향이의 행동에는 한 낭군에 대한 정절 의식이 가장 중심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 이 도령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개입되고 있지만 사랑과 신의 그리고 악인에 대한 징벌 의식이 주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런 작중 인물 특히 주인공들에 부여한 행동의 동기는 곧 작자의 의도이며 그것은 그 작품의 주제와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사법의 글을 쓰는 데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보여 줄 것이냐 하는 문제와 함께 그런 행동이 왜 나타나는가를 말해 주는 적절한 동기 부여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한 마디로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고 뜻있는 행동, 이유가있는 행동이 되도록 해야만 그 행동이 가치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흔히 심청전을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판소리라고 평하는 데 그 까닭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작중 인물 심청의 행동 동기의 숭고함이 우리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는 것이다. 작가 최인호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기 9.56] "눈뜬 장님"
심청전은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판소리입니다. 봉사 심학규는 딸을 낳은 지 7일 만에 아내를 잃어버리고 동냥 젖을 얻어먹이며 근근히 살아갑니다. 심청이가 13살 되던 어느날 장승상댁으로 일을 나갔던 딸이 돌아오지 않아 마중을 나갔던 심봉사는 그만 개울에 빠지게 됩니다. 때마침 화주승이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살려달라는 심봉사의 외침을 듣고 구해주면서 "공양미 삼백석만 부처님께 바치우고 진심으로 불공하면 어둔 눈을 떠서 대명천지를 볼지리다." 심봉사 눈뜬다는 말을 듣고 앞뒤를 가리지 아니하고 덜컥 약속하였지만 삼백석을 구할 길은 도무지 없어 캄캄하던 차에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심청이는 고민 끝에 남경장사에게 자기의 몸을 팝니다. 마침내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져 죽고 심봉사는 삼백석을 부처님께 바쳤으나 눈을 뜨지 못합니다. 뺑덕어미에게 그나마 가진 것 다 빼앗겨 알거지가 된 심봉사는 부활하여 황후가 된 심청이가 벌인 맹인잔치에 참석합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잔치를 벌인 심청이는 아직도 눈을 못 뜬 아버지를 보자 기가 막혀 울기 시작함니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 풍랑 중에 빠져 죽던 심청이 살아서 여기 왔소." 이 말을 들은 심봉사 "아니 누가 날더러 아버지라고 혀. 나는 자식도 없고 아무도 없는 사람이오.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이거든 깨지 말고 생시거든 어디 보자"하면서 감은 눈을 '휘번쩍'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심청전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가진 위대한 화두(話頭)라고 생각합니다. 심봉사는 고양미 삼백석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공양미가 아니라 딸을 보고싶은 절대의 사랑이 었습니다. 그 사랑이 있었다면 심봉사는 딸을 죽이지 않고서도 미리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심봉사가 눈 뜨는 데는 평생이 걸렸지만 우리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을 멀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우리 들이야말로 눈뜬 장님이며 심봉사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심청이, 나의 주님.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두 눈을 심봉사처럼 휘번쩍 뜨게 하소서.
--최인호, 서술주보 94/3/13
다음은 <백범일지>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감명을 받는 것은 행동자 김구 선생이 보이는 행동의 동기이다.
[보기 9.57]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을 대답할 수 있느냐?"
하고 묻기로 나는,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 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하고 대답한 즉, 김윤정은 술을 들이라 하고물 대신 술을 먹여 주었다.
김 경무관은 청상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 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있소."
하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일인을 왜 죽였느냐? 그의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
하고 김 경무관이 물었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지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놈 원수 한 명을 때려죽인 일은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일은 없소."
하고 대답했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복띵 뿐이요, 정내는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그 때 옆 의자에 걸터 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를 하고 있는 일본 순사(뒤에 들으니 와타나베라 한다)가 심문 벽두에 정내의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보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하여,
"이노옴!"
하는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상대방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더냐. 이 개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었더니, 와타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
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나쁜 욕인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감이 돌았다.
-- 백범정신선양회(엮음), <백범일지>. 서울:하나미디어.
(2) 행동자의 성격
서사문이 드러내는 의미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행동자의 성격이다. 성격은 행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격은 그 사람의 운명이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지배적인 영향을 준다. 나쁜 성격에 좋은 행동이 기대될 수 없으며, 좋은 성격에서 나쁜 행동이 또한 잘 나오지 않는다.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고,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따라서 서사법에서는 행동자의 성격을 매우 중요시한다.
성격은 대개 어떤 행동의 원인으로서의 구실을 한다. 어떤 사람이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을 한다고 할 경우에 그 사람을 다루는 서사법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착한 행동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행동의 동기로서 신앙적인 것 또는 그 밖의 의도적 동기를 내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성품도 그만 못지 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동기가 훌륭하더라도 그런 착한 일을 하는데는 거칠고 교만한 성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요 꾸준히 계속되는 것일 경우에는 그 성격적 요인은 매우 큰 몫을 차지한다. 앞에 말한 이순신 장군이나 김구 선생의 경우에도 그분의 성품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어떤 이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데는 행동에 맞갖은 성격을 전제로 하고 다루어야 한다. 곧 그 행동과 동떨어진 성격,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성격이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어떤 성격을 중시하여 드러내려고자 할 경우에는 거기에 맞갖은 행동이 선택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그 성격으로서는 기대될 수 없는 행동은 특수한 이유가 없는 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전과 7범인 흉악범이 어떤 선량한 사람에게 양심적 행위를 하라고 타이르는 행동을 했다고 하자. 보통 상식으로는 납득키 어려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오랜 감옥살이를 통하여, 특히 종교적 감화를 받고 인생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난 연후의 일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일종의 성격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서사문에서 행동자의 성격을 나타내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기술법이나 설명법에 의한 경우와 행위의 서술에 의한 경우가 그것이다. 기술 또는 설명 방식은 등장 인물에 관하여 용모, 마음가짐, 사고 방식, 취미 등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의 용모는 인자하고 온화한 성품을 드러낸다"든지, "그의 마음은 비단결 같아서 남에게 모진 짓을 하지 않는다" 따위로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이나 설명 방식은 서사법에 대한 보조적 기능을 한다. 행위의 서술 방법에 의하는 경우는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하여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는 정직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이 그의 행동을 보여 준다. "그가 장관을 지내던 시절에 해외 여비를 실비 그대로 쓰고 나서는 나머지가 있으면 국고에 반납하곤 했다. 그는 이처럼 해외 여비를 남겨서 숱한 선물을 사가지고 들어오던 딴 사람들과는 유달랐다." 이런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정직성이라는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둘째 방식으로 행동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경우는 양자가 상호 작용을 한다. 행동은 거기에 상응한 성격을 드러내고 반대로 성격은 거기에 맞갖은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 따위에서는 어떤 행동이 성격 창조를 하고 그 창조된 성격의 지배를 받아서 필연적으로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 한 전쟁 고아가 갖은 풍파 속에서 시달린 끝에 강인한 의지의 사나이로 자란다. 무쇠 덩이와도 같은 굳고 차가운 성격으로 그는 유수한 사업가가 되고 마침내 재벌이 된다. 그러고도 그는 더욱더 큰 재산을 모으는 데 악착같은 행동을 그칠 줄 모른다. 이런 줄거리의 소설이 바로 성격과 행동의 상호 작용 관계를 잘 보여 준다.
특히 어떤 등장 인물의 전형적인 성격 창조가 주목적으로 되어 있는 작품에서는 힝동은 오로지 성격을 위해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 이런 작품에서는 모든 행동들이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동원되고 있으며 그것과 관련없는 행동은 없다. 그가 보이는 일거수 일투족이 성격의 부각으로 집중된다. 이런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독특한 성격이 그의 여러 행동과 함께 인상깊게 떠오른다.
다음 글은 소설 작품의 경우가 아니지만 인물의 성격이 행동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보기 9.58]
우리 집은 밥을 먹을 때 어른들과 오빠는 같은 상에서 먹었다. 우리들은 오빠가 먹는 상보다 조금 낮은 상에서 먹었다. 내 손이 맛있는 반찬이 연거푸 가면 오빠는 상밑으로 우악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니까 이따가 보자, 너 죽을 줄 알아"라는 신호다. 밥먹을 때 코만 한번 훌쩍여도 상밑으로 "너 이따 보자"라는 부먹이 나왔다. 오빠의 주먹이 보이면 밥 떠넣고 반찬집어 먹을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있는 힘을 다 해 코 속에서 헛바람 소리가 날 때까지 코를 깨끗이 하고 다시 들어갔다.
오빠가 묻는 말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그까짓 것도 모르느냐고 때리고 안다고 대답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 한다고 때렸다. 나는 이렇게 억울하게 맞았지만 오빠에게 감히 대꾸 한 번 못하고 부동 자세로 서서 맞아야만 했다. 울면 운다고 더 때리니까 말이다. 서너살밖에 안 된 동생도 오빠한테 맞고는 울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금도 나는 억울하게 맞을 때 오빠를 호되게 혼내주지 않은 어머니가 야속하다. "이름 다른 자식"[장손]이라서 함부로 혼낼 수가 없었는지 어머니는 그런 오빠를 야단친 적이 없었다.(중략)
할머니는 늘 오빠에게 정성을 다했다. 인삼과 대추를 다려서 쓰다고 안 먹겠다는 손자와 실랑이를 별였다. 어느날 보약을 받아 든 오빠가 꽉 쥔 주먹을 나에게 내보이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뒤안 구석지로 데리고 가더니 약사발을 내밀었다. 겁을 잔뜩 먹었던 나는 약사발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할머니가 묻거들랑 내가 마셨다고 햐"라는 엄포를 들으며 쓰디쓴 약을 얼굴도 찡그리지 못하고 마셨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번갈아가며 이름 다른 자식을 위해서 정성스레 달인 보약은 자주 내 차지가 되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 추위도 잘 안타고 감기로 고생해 본 기억이없다. (중략)
-- 여인언, "어느 폭군"
윗 글은 가정 주부가 쓴 글의 일부인데 장손으로 특별 대우를 받고 자라던 오빠가 동기들에게 폭군처럼 굴었던 행동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행동 서술 자체만으로도 그 인물의 성격이 실감있게 표출되고 있다. 이는 그 인물의 행동 가운데 그 특유한 횡포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점만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배열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자신의 독특한 일면을 그 행도을 통해서 보여주는 글이다. 서사법은 이런 면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기 9.59]
자기의 아끼던 소유물을 잃어버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특히 남보다 병적으로 빈번히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분실의 명수가 된 이런 증세를 뭐라 일컬어야 하나? 건실증이랄밖에.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철들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치유할 수 없는 건실증에 걸려 있다. 근 몇년 동안만 쳐도 우산을 4개나 잃었으며 장갑을 3켤레나 분실하였다. 라이터가 셋, 만년필이 둘, 도장이 셋, 책과 종이가 든 종이 봉투를 셋... 얼핏 생각나는 것만 하여도 이러한 것들을 영영 잃어버렸으며 잃어 버릴 뻔하다가 찾은 소지품은 그 몇 배가 된다. 다음날에나 생각이 나서 다방이나 식당이나 친구의 사무실에 다시 가서 찾아 온 것이 허다하며 심지어는 몸의 일부인 안경까지도 영영 잃어버리고 새로 맞추어 끼었는데 얼마 뒤에 이발소 주인이 가져다 준 일까지 있다.
돈이 좋은 거라는 의식이 싹튼 네댓 살 적부터 그것과 나와는 인연이 별로 닿지 않는 것이 된 것도 타고난 나의 건실증 탓이다. 외조부가 주시는 동전은 한 시간도 못되어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분실이 끝없이 반복되자 어른들은 나에게 돈을 아예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일제 말기 시골에서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별로 없었다. 그처럼 귀한 운동화를 사다 주었들 때 나는 고 달콤한 고무 냄새를 맡고 맡다가 머리맡에 두고 잤다. 그런 운동화였지만 처음 신고 나간 날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렁이를 잡으러 논둑에 벗어 놓고 들어가서 그냥 계속 두렁을 넘고 넘어 다음 논으로 그 다음 논으로 전전하였기 때문에 어디에다 벗어 놓았는지 도시 헤아릴 도리가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진또도리나"나 "찌갈기기"나 "돼지 방광차기" 놀이를 하다가 흥취가 나면 웃통을 벗어놓고 놀았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와 밥상에 대어 앉았을 때 글쎄 어쩌자고 알몸으로 덤비느냐 말이다. 벗어 놓은 채 옷은 잃어버리고 왔던 것이다. 저고리를 찾으러 달려 가 보면 철지난 해수욕장처럼 적막한 풀밭에 나의 저고리는 촉촉히 이슬에 젖어 걸레쪽 처럼 구기박질러 있곤 했다.
--유병석, "건실증" 중에서
윗 글은 자신의 한 두드러진 특징을 집중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쓸거리가 독특할 뿐 아니라 서술 문체 또한 거기에 잘 어울리고 있어서 재미있는 서술문이 되었다. 특히 각 사건마다 딴 단락으로 처리하고 있어서 글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다루는 사건들을 잘 구분하여 짜임새있게 엮어 간다면 좋은 서사문이 될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3) 행동이나 사건의 배경
행동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이나 자리 등을 배경이라 한다. 이 배경도 동기, 성격과 함께 행동이나 사건의 의미 형성에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첫째로, 행동이나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여러 제약이 따른다. 집에서 행동하는 경우와 밖에서 하는 경우가 다르며, 보는 이들이 적고 많은 자리가 같지 않다. 특수한 직장, 가정의 경우가 다르며, 국내외가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여름에 속옷 바람으로 집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문제될 것은 없지만, 대문 밖만 나가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행동을 말하는 데는 장소적 여건을 늘 고려하고 맞갖은 장소의 선택을 배려해야 한다.
둘째로, 환경적 여건도 행동이나 성격의 형성에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잔인한 흉악범의 행동과 성격은 그 자라난 환경과 많은 관련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교원, 공무원, 군인, 사업인, 정치인 들의 행동, 말, 성격 등이 각기 다른 특색을 보임은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므로 행동이나 사건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환경적 여건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환경과 동떨어진 행동이나 사건이 벌어질 경우에는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완 조치가 있어야 한다. 독자는 일반 상식으로 작중 인물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앞의 [보기 9.58]에서 보인 "오빠"라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은 그가 장손으로서 집안 어른들의 특별 대우를 받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것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윗글의 원문에서는 이 사실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배경의 서술은 그 인물의 성격과 행동의 원인 또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서사문에서 이런 배경을 나타내는 데는 설명법과 묘사법을 빌어 쓰는 일이 많다. 곧 서사법에서는 흔히 행동이나 사건을 서술하기 전에 시간과 장소 등의 여건이나 분위기를 묘사하거나 설명을 하는 것이다. 다음 보기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보기 9.60]
1895년 11월의 제 3주, 런던은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 주간의 일요일에서 목요일까지, 베카 가에 있었던 우리쪽의 집 창문에서 건너편 집들의 모양이 어렴풋이나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시가를 휩싸고 있었다. 그 첫날, 휴즈는 집안에서 두꺼운 참고서에 색인을 경사지게 붙이며 보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엔 요즈음 마음 붙이기 시작한 일 - 중세 음악 - 로 하루를 견디어 냈다. 그런데 넷째 날 아침을 먹고 의자를 뒤로 밀어 놓고 바같을 내다보고 나서는, 성급하고 활동적인 홈즈로서는 그 단조로운 생활을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육중한 다갈색 안개의 소용돌이 가 가시지를 않고 기름기같은 물방아 루이 되어 유리창에 엉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억누르고 있었던 정열이 끓어 올라 손톱을 물어 뜯어 보기도 하고 가구를 두들겨 보기도 하고 공연한 역정을 내기도 하며 방안을 초조히 돌아 다니기도 하였다. --김국자(역), 코난 도일의 "부러스-파딩튼의 설계서"중에서
이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작중 인물이 어떤 행동을 벌일지 모르는 긴박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놓여 있는 환경적 배경 때문이다.
다음 보기는 근래에 글짓기를 익힌 가정 주부가 옛날 일을 회상하여 마련한 서사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추석 명절이라는 특수한 배경과 관련되어 펼쳐짐으로써 흐뭇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보기 9.61]
또르르르 또르, 짤짤 짜르르르, 잔디밭 풀섶에서 벌레들이 연일 홍을 돋울 무렵이면 중천에 떠오르는 달 모양이 어서어서 쟁반처럼 둥글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두리 어릴 적에만 해도 이렇게 추석날이 다가오면 서울 한복판에서도 어디를 가나 그 환상의 추석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고 그날에 펼쳐질 이야기 꽃이 한창 피어나곤 했다.
드디어 팔월 열나흗날이 다가 왔다. 이날 나는 무척 바빴다. 오전반을 마친 나는 집에 오자마자 솔잎을 따러 갔다. 따라오겠다고 눈치를 보며 빼죽거리는 동생을 간신히 따돌리고 이웃집 친구와 함께 바구니를 들고 성북동 골짜기로 냅다 달려 갔다. 엄지, 검지, 장지 세 손가락으로 솔 잎을 잡아당기면 연한 배추빛 끝이 뾰족하게 나오면서 쏙쏙 잘 뽑힌다. 가끔씩 끈끈한 송진이 묻은 고동색 잎받침이 붙은 채로 뽑히면 손끝으로 일일이 빼내야 했다. 소복이 늘어나는 솔잎을 꼭꼭 누르면서 얌전하게, 될 수 있는 대로 가지런히 놓으려 애썼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배고픈 것도 잊고 친구의 바구니를 힐끔힐끔 보아 가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소나무를 따라 정신없이 다니다가 돌아갈 길마저 잃고 헤매던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집에 당도하였다. 어머니는 올 추석 송편은 더 맛있겠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고 할머니는 손녀 딸을 누가 데려갈지 그 녀석 호박 떨어 졌다고 하였다. 두손으로 솔잎을 움켜쥐고 코를 대어보면 풋풋하고 싸리한 솔잎 향기가 가슴 깊이 스며 들었다.
이윽고 마당 한쪽에 맷돌을 내어놓고 고모는 녹두를 갈고 할머니는 자배기 속이 커다란 생선으로 포를 뜬다. 지짐질하는 냄새가 집안 가득하다. 툇마루에는 씻어서 차례상에 올릴 과일과 밤 대추가 소쿠리에 담겨져 있다.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어머니의 그 큰 손으로 둥그렇게 반대기를 지어 치대서 젖은 베보자기로 덮어 놓는다.
식구들이 마루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송편을 빚기 시작한다. 떡 반죽을 밤톨 만하게 떼어 손바닥에 마주 굴려서 옹심이를 만든다. 가운데를 오목하게 벌려 속을 채운 다음 입을 오므린다. 정성껏 만들어서 서로 자기 것을 내보이면 할머니 솜씨는 구수해 보이고 어머니 솜씨는 얌전하다. 내가 만든 것은 작고 귀여웠다.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딸 낳는다고 어르시는 할머니 말씀이 솔깃하여 자꾸만 예쁘게 만들려고 애썼다.
동글동글하고 갤쭉한 송편이 커다란 두레반과 목판에 가득히 채워지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시루번으로 시루를 고정시키고 솔잎 한켜 놓고 송편 얹기를 번갈아 하여 하나 가득 채운다. 아궁이에 장작을 어슷어슷 들여 놓고 쏘시게에 불을 지펴 타닥거리며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에 얼굴이 화끈거릴 때쯤엔 시루에서 뜨거운 김이 오르고 열어 놓은 부엌문 바깥은 어느새 어둠이 깔린다.
이윽고 나는 신나게 펌프질을 하여 찬물을 통에 철철 넘치도록 받아 놓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다된 송편에서 솔잎을 떼어내며 이 물에 재빨리 씻어 소쿠리에 건져서 참기름을 반지르하게 발라 놓는다. 계피향이 은은한 팥송편, 간간하고 고소한 녹두 송편도 있다. 내가 만든 깨송편을 골라내어 한입 꼭 깨물어 오물오물 먹어본다. 쫀득쫀득하고 솔잎 내가 솔솔나는 고소한 송편이 감칠 맛이 난다. 송편이 다 되기까지 나도 한 몫 한 것이 어쩐지 어깨가 으쓱했다.
어머니는 미리 손질해 놓은 한복을 꺼내어 머리 맡에 내어 놓는다. 동생은 색동저고리에 진분홍 치마이고 내 것은 노랑 저고리에 다홍 치마다. 두손으로 발과 씨름을 하며 신어야 할 하얀 버선도 있다. 코끝이 빨갛고 꽃무늬가 꼭꼭 박힌 고무신을 사온 아버지는 우리 딸들이 내일은 더 예쁘겠다고 하며 웃었다. 동생들은 꽃고무신을 손에 끼고 엎드려서 방을 기어다녀 보기도 했다.
밤늦도록 잠도 안 자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손을 돕다 보면 문득 앞집기와 지붕 위로 덩그렇게 떠오르는 달이 내 마음을 공중으로 덥썩 안아 올려 가슴 부풀게 하였다.
또한 앞뜰, 뒷뜰, 마루나 방 어디를 가나 세월 만난 듯 풍성하게 갖추어진 음식과 옷가지를 따라 내 마음은 끝없이 흐뭇하고 뿌듯하였다. 이렇게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내 마음의 까치 추석은 이렇게 지새어 갔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서글프게 변했다. 명절이나 평일이나 다를바 없이 별 감흥을 못느끼는 요즘 아이들을 볼 때 마냥 안스럽기만 하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옛날 우리들의 그 소박함을 되살려 줄 수는 없을까? 올 추석에는 딸아이와 장도 보고 쌀을 담가 송편도 빚어 볼까한다.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례는 내 마음의 까치 추석을 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고 싶은 마음이 불연듯 일고 있다. 나의 잊지 못할 그 추억이 늘 변함 없는 하늘의 별들처럼 다시금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픈 마음 간절하기만 하다. --이상일, "까치 추석" 중에서
이 글의 모든 소재들은 까치 추석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어울리도록 선택되었고 또 어릴 때 겪었던 명절 분위기를 잘살려 주는 서술을 하고 있다. 동일한 재료요 줄거리라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정감, 특히 동심 세계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글의 효과는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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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사문의 몇 가지 특성
